또 하나의 눈 --어제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동대문 시장에 들렀지요. 이것저것 사다 보니 자질구레한 종이 뭉치가 대여섯 개나 됐나 봐요. 그걸 양쪽 손에 다 들고 오느라니까, 시장 안에서 신문을 파는 앉은뱅이 청년이 있잖아요. 스무남은 살이나 됐을까요. 팔에다 무슨 보급원인가--그런 완장을 둘렀어요. 그런데도 불구자 같은 궁기가 없고 퍽이나 명랑해요, 얼굴 표정이--. 밖에서 별로 신문 같은 것 산 일은 없었지만 그냥 지나가기가 무엇해서 10원을 꺼내서 신문을 샀지요. 두 장인지 석 장인지 주는 대로 받아서 그걸 또 짐 가진 손에다 구겨 쥐고--그리고 몇 걸음 가자, 뒤에서 '아주머니!' 하고 누가 불러요. 딴 사람을 불렀거니 하면서도 짐짓 돌아다보았지요. 그랬더니 가게 앞에 웬 중년 남자가 서서--..
* 과 내용이 비슷하지만 꼭 같지는 않음(부흐고비) 왕후의 밥, 걸인의 찬 그 내외는 가난했다. 보통이면 사내가 직장으로 나가고 아내는 집을 지키기 마련이건마는 그 내외는 세상의 상식과는 반대로 아내가 직장으로, 교사이던 남편은 학교 일을 그만두고 집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실직자였다. 어린것은 아직 없었다. 젊은 아내의 직장은 그들이 깃들어 사는 단칸방에서 과히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어느 개인 회사에서 회계 사무를 맡아 보는 것, 그것이 그 젊은 아내의 직업이다. 어느 날 쌀이 떨어져서 아내는 아침밥을 굶은 채 직장으로 나갔다가 점심 시간을 틈타서 잠시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에 나갈 때 남편의 한 말이 있다. "어떻게라도 변통해서 점심을 지어 둘께 시장해도 그 때까지만 참으라우." 방 안에는 밥상이..
* 과 내용이 비슷하지만 꼭 같지는 않음(부흐고비) 실패란 것이 있고 성공이란 것이 있다. 어떤 것이 성공이며 어떤 것이 실패인가를 ㄱ 씨는 모른다. 천 원어치 행상꾼이 만 원 밑천으로 판자 가게를 내게 된 것도 성공이요, 10억 자본의 큰 회사가 5억으로 줄어든 것도 실패라면 실패이다. 10만 원 이윤을 기대했던 장사가 5만 원 번 것은 실패라고 볼 수 있고, 5천 원을 바랐다가 만 원이 생기면 이것은 성공일 수밖에 없다. 하필 물질이나 장사 속에만 한한것이 아니리라, 인간 일생를 통틀어서 과연 어느 것이 성공이요 어느 것을 실패라고 할 것인가? 이 점에 있어서는 언제나 ㄱ 씨는 회의적(懷疑的)이다. 그러나 누구의 눈에도 뚜렷한 결정적인 실패란 것이 있다. 누구나 인정하는 불행도 있다. 이 실패, 이 ..
‘잭 런던’의 2부작 ‘황야의 부르짖음’과 ‘흰 엄니’는 둘 다 개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다. 하나는 주인을 잃은 집안 개가 전전유리(轉傳遊離)하던 끝에 마침내 알래스카의 이리떼들과 휩쓸려서 차차 그 본성으로 돌아가는 스토리이고, 또 하나는 그와 반대로 이리 새끼가 사람의 손에서 길러지는 동안에 본연의 야성을 떠나 사람과 친화해가는 경로를 그린 것이다. 소설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에 한두 번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구절들이 있다. 우리말로도 번역이 되어주었으면 하고 내가 바라는 작품 중의 하나이다. 아무리 개에 대해서 무관심한 이, 개를 싫어한다는 이도, 한번 이 작품을 읽으면 심경이 일변해버릴 것이다. 충무로 3가의 K당(堂)은 단것 좋아하는 이들에게 인연 두터운 과자집이다. 그 댁에 테리어 한 마리가 있..
계절 중에서 내 생리에 가장 알맞은 시절이 겨울이다. 체질적으로 소양小陽인 데다, 심열心熱이 승하고 다혈질이다. 매양 만나는 이들이 술을 했느냐고 묻도록 얼굴에 핏기가 많고 침착 냉정하지 못해 일쑤 흥분을 잘한다. 아무리 추운 날씨라도 김 나는 뜨거운 것보다는 찬 음식을 좋아한다. 남국에서보다는 눈 내리는 북극에 살고 싶다. 그러면서도 유달리 추위는 탄다. 추위에 대한 저항력이나 자신으로 겨울을 좋아하느니보다, 추위 속에서 그 추위를 방비하고 사는, 추위는 문밖에 세워 두고 나 혼자는 뜨끈하게 군불 땐 방 속에 앉아 있고 싶은, 이를테면 그런 ‘에고’의 심정이다. 눈보라 뿌리는 겨울 거리에 외투로 몸단속을 단단히 하고 나선, 그 기분이란 말할 수 없이 좋다. 어느 때는 외투라는 것을 위해서 겨울이 있는 ..
유신 말기의 정치 상황은 험악하고 살벌했다. 그 무렵, 나는 경북의 오지, 영양군으로 일자리가 옮겨졌다. 워낙 산중 고을이라 유배지로 쫓겨가는 서글픈 생각마저 들었다. 허나 이내 그곳 산수와 인심에 따뜻이 보듬겨져서 세상 바뀌는 줄도 잘 모르고 삼 년 세월을 훌쩍 흘려보냈다. 영양은 산이 깊고 물이 맑았다. 수림이 울창해서 공기가 신선하고 하늘은 더없이 높고 깨끗했다. 해가 지면 밤하늘의 야경이 더욱 아름다웠다. 그 많은 별들은 저마다 보석처럼 반짝이며 천상의 향연을 베풀곤 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그 향연에 초대되어 자신의 실체를 비로소 깨닫고 부질없는 집착에서 벗어나 본다. 봄, 여름, 가을 밤마다 애타게 우는 소쩍새의 울음소리는 사람들의 가슴을 쓸어내리고 또 쓸어내린다. 마침내 맺히고 서린 한과..
옛 사람들은 동지부터 99 소한도를 그리면서 겨울을 보냈다던가. 추웠던 시절 매화도를 그려놓고 매일 한 송이씩 붉은 물감으로 색칠하며 홍매를 피워냈다지. 마지막 99송이 홍매화가 피어나면 창밖의 매화나무에 진정 매화가 맺힌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풍류를 누릴 수나 있었겠나. 특권을 누렸던 조선의 문인 화가들에게나 해당된 복이 아니었을까. 매화 그리기에 벽(癖)이 있던 조선 후기의 화가 조희룡쯤이면 당연했으리라. '매화도 대련'이나 '매화서옥도'는 겨울에 보면 어찌나 화사한지 추운 겨울이 무색할 지경이니 말이다. 그의 매화는 전 시대의 문인들처럼 매화를 짓누르고 있던 힘겨운 상징성과 지조성을 전부 털어버렸다. 푸르스름한 달빛 아래 고고한 청덕의 매화가 아닌 꽃 자체로 아름다울 뿐이다. 매화병풍을 둘..
언 땅이 녹자 묵정밭을 갈기로 했다. 운동 삼아 우리는 한 열흘 동안이나 돌을 골라냈다. 큰돌은 밭두둑에 보기 좋게 쌓아두었다. 잔돌까지 골라내고 보니 흙이 모자랄 것 같았다. 잔디밭 깔 때 쓰는 마사토를 섞으니 어느 정도 보드라운 밭이 되었다. 거름도 적당히 넣었다. 불혹의 나이를 넘어서야 처음 해본 호미질이었다. 몹시 힘들었지만 신나는 일이었다. 이래서 노동이 신성하다는 것인가. 어떤 모양으로 꾸밀까 생각했다. 고추밭을 세 이랑쯤 만들면 100모는 심을 수 있겠다. 고추는 5월 초쯤 심어야 하니 우선은 비워둔다. 봄부터 가을까지 야채를 심을 곳을 중점적으로 만들었다. 상추, 쑥갓, 뿌리와 잎에 영양이 많은 비트, 칼슘이 많은 아욱과 케일도 심어야 한다. 밭 가장자리로는 옥수수를, 일조량을 생각하여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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