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비 그친 화단은 충분히 물기 먹은 꽃들이 오랜만에 보는 햇살 아래 기지개를 펴고 있다. 알록달록 자잘하니 서로 키재 듯 서 있는 다알리아는 참 귀엽다. 올봄에 사다 심은 알뿌리가 행여 죽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이렇게 곱게 자라 꽃송이는 작지만 아담스리 피어준 것이 참 고맙기만하다. 다알리아 꽃 뒤로 조선거미 한 마리가 한창 집짓기에 여념이 없다. 이번 비로 이쁘게 엮어 짜놓은 거미줄이 망가졌는지 이쪽저쪽 다니면서 꽁무니의 실을 뽑아가며 열심히 집을 짓는다. 설계도도 없이 어찌 살집을 저리 잘 짓는지 미물이지만 존경심이 드는게 "나는 저 거미만도 못한 미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거미란 놈은 거미줄이 망가지면 그 즉시 보수공사를 한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일을 하는데 조그만 일을 하..
내가 이중섭 화백을 만난 것은 1954년의 여름으로 기억된다. 장마비가 멎은 늦은 아침인데, 이젠 그도 고인(故人)이 된 무용가 옥파일(玉巴一) 씨가 동반하여 사무실로 찾아온 것이다. 구두는 말할 것도 없고, 바지가랑이까지 흙투성이가 된 두 사람은 어디서 마셨는지 아침부터 거나해 있었다. 두 사람이 문을 열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여 들어서자마자 옆에 있던 직원이 피식 하고 웃음을 뿜었을 만큼 그들의 행색은 간밤의 비에 젖은 흔적으로 무척 후줄근하고 초라하게 보였다. 원래 데카당스의 기질(氣質)이 짙은 옥파일씨도 그러하거니와 그보다도 동반자(同伴者)의 차림새나 모습은 두드러지게 개리커처하였던 것이다. 부스스한 얼굴에 노르스름한 콧수염을 기르고 시체엔 보기 드문 베레모 같은 것을 썼는데, 무릎이 나온 '사지..
그 면도사 아가씨는 좀 수다스러웠다. 단골로 다니는 이발관이 어디냐, 면도를 해 주는 아가씨의 솜씨가 어떻더냐, 되도록 면도사도 단골로 정해 놓고 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수염의 결을 잘 알아서 밀기 때문에 피부에 무리가 안 간다는 등의 얘기를 간단없이 소곤거렸다. 누구나가 다 그럴 테지만 이발하는 시간, 특히 의자에 길게 누워서 면도를 하고 있는 동안은 느긋하게 오수午睡를 즐길 수 있는 십상의 기회가 된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도 하루의 행복을 찾으려면 이발을 하라고 했다던가. 그런데 이 아가씨는 그 모처럼의 행복을 부질없는 수작으로 박탈하려 드는 것이다. 나는 슬그머니 눈을 감고 아가씨의 요설饒舌이 끝날 때를 기다렸다. 따지고 보면 면도하는 동안은 휴식을 누릴 수 있는 느긋한 시간인 반면에 항상 불안..
새벽 네 시면 차임벨 소리에 잠이 깬다. 교회의 차임벨은 새벽 네 시가 되면 어김없이 울린다. 이 성가(聖歌)를 울리는 종소리가 어둠을 깨고 누리에 퍼지면 도시에는 새로운 하루가 열리게 된다. 통금(通禁)이 풀린 거리를 자동차가 신바람이 나서 질주하고, 해장국집이 문을 연다. 그래서 차임벨은 통금해제의 신호이기도 하다. 10여 년 전만 해도 밤 열두시의 통금과 새벽 네 시의 해제 시간은 싸이렌이 알려 주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싸이렌은 화재를 알리기 위해 소방서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비상 신호 기구였다. 어릴 때 싸이렌이 울리면 두근거리는 가슴을 움켜쥐고 불이 난 곳을 찾아 불구경을 가던 생각이 난다. 이것이 정오의 시보(時報)로도 이용되다가 2차대전 말기에는 공습을 경보하는 공포의 음향으로 변했다. 이런 ..
제17회 토지문학제 평사리문학상(토지문학상) 대상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사거리 중국집주차장에 웬 사내가 군드러져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두 손으로 받친 채 자고 있는 사내 옆으로 반쯤 남은 소주병이 파수꾼처럼 서있다. 아니꼬운 사내를 사람들이 힐끗 쳐다보며 지나간다. 무심히 지나치려는 나를 사내의 알근한 구두 한 짝이 빤히 쳐다보며 아는 체를 했다 . 어린 시절, 추운 겨울에도 양말을 신을 수 없을 만큼 가난했었다. 애옥한 형편에 새 신발이라야 고작 일 년에 한두 번, 명절빔으로 받은 검정 고무신이나 운동화가 전부였다. 강산이 두 번씩 바뀌어도 우리 집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다행히도 흐르는 시간은 촌스러운 나를 싸구려 구두를 신어도 아름다운 나이로 만들어 주었다. 그가 내민 화..
지난가을 장 선생 덕수궁 현대미술관에 갔다. 이중섭 ‘백 년의 신화전’이었다. 그를 만나러 온 사람들 발자국이 긴 줄에 엮여 백 년의 신화를 함께 호흡하고 있었다. 우리도 그들 속도를 맞춰 지난날의 이중섭 인사를 나누었다. 그의 대표작 ‘소’ 그림을 시작으로 여러 방을 관람하는 도중, 장 선생이 무엇인가 발견한 듯 입을 열었다. “응, 그래! 바로 그거였어. 이제야 알겠군.” “무엇을요?” “그림의 제목을 좀 봐. 저 제목 이 제목, 저기 저 제목도.” “아, 그러네요. 제목마다 로 되어있네요.” 이중섭은 아내 아들을 사랑하는 일이 인생의 목적이었다. 그랬던 그가 가난 때문에 가족 생이별하여 그리움의 세월을 살아야만 했다. 그런 탓인지 그림에 유난히 가족들,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었다. 가..
문인들과의 나들이는 언제나 기대만발하다. 구월 초순, 옷깃을 스치는 선들바람에 가을 냄새가 얼핏 스쳐가지만 한낮 땡볕의 기세는 녹록치 않다. 이번 코스는 동부 해안도로를 경유하며 식산봉 둘레 길도 걷는다. 같이 한 일행 거의가 고향이 제주인데도 지역마다 비경을 자랑하는 해안도로를 지날 때는 처음 본 것 마냥 눈들이 빛났다. 시냇물도 끼리끼리 모여야 졸졸졸 노래하듯이 우리끼리도 눈길 주는 곳마다 이야기꽃이 피어난다. 나와 자리를 같이 한 문우와는 눈짓만으로도 감성이 오고 가니 하루의 시작이 신이 난다. 식산봉은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느낌이 있는 곳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작은 섬처럼 보여서 섬 속 또 하나의 섬으로 다가온다. 오름 입구로 들어섰다. 각종 키 큰 수목들이 입구부터 울창하다. 바로 해안가..
제22회 신곡문학상 수상작 바라나시. 인도에서 가장 인도다운 곳. 그곳에는 갠지스 강이 흐른다. 인도 사람들은 갠지스 강을 흠모한다. 그들은 갠지스 강을 어머니의 강이라 부른다. 시바를 아끼고 숭배하는 만큼, 살아서나 죽어서나 갠지스 강에서 자신의 몸을 씻길 원한다. 씻는다고 하는 뜻은, 청결의 의미와 함께 정화를 바라는 그들만이 지닌 순수함의 근원일 게다. 세상에 태어나 희로애락을 겪으며 살다 죽음을 맞이했을 때, 신에게로 가까이 갈 수 있는 통로가 그들은 갠지스 강이라 믿고 있다. 힌두교 순례자들은 인도 최고의 성지인 바라나시로 평생 쌓인 죄를 씻어내기 위해 모여든다. 그들은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가에서 화장을 하게 되면 해탈을 하게 된다고 믿기에 이곳에서 죽기를 소원한다. 영적으로 깨어 있다는 바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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