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행복하다. 이만하면 됐다. 점잖은 그녀의 남편은 묻는 말 열 중 여덟아홉은 그녀가 원하는 쪽 대답을 한다. 어쩌다 살짝 마음에 걸리는 한두 가지도 그녀의 위트 넘치는 말솜씨로 얼마든지 돌려놓을 수 있다. 결혼 초반 부부싸움의 원인 제공자였던 아들도 얼마 전 결혼해 서울로 살림을 났다. 명랑 쾌활한 막내딸도 직장에서 일어나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카카오톡으로 보내온다. 가족들의 그 재미난 일상을 앉아서 보고 듣는다. 시대에 맞게 실시간으로 산다. 아들과 딸은 터울이 좀 지게 낳았다. 부러 그런 건 아니다. 시댁의 어려운 조건들을 감당하느라 힘들어서 그랬다고 보는 게 맞다. 아들이 유치원 들어갈 나이가 되어서야 딸을 낳았다. 그 무렵 참 무기력했다. 아들이 유치원 갈 때 소파에 드러누우면 그..
내가 제일 처음 배운 우리말 글자는 ‘오’자였다. 아주 어렸을 때 펄 S. 벅의 를 번역하시면서 끝없이 교정을 보시는 아버지 곁에서 어머니, 언니, 오빠가 원고 정서에 매달려 정신없을 때 심심해 하는 내게 등장인물 ‘오란’ ‘왕릉’ 등 몇 개의 이름을 적어 주면 나는 흉내 내어 그 글자들을 써 보곤 했다. 를 비롯해서 스무 권에 가까운 펄 벅의 작품을 번역하셨던 아버지 덕에 내가 자라나는 동안 펄 벅은 늘 이웃집 할머니처럼 친숙한 이름이었고, 후에 내가 영문학도가 되어 처음으로 원서를 읽은 작품도 였다. 불후의 명작 외에도 80권에 달하는 작품을 쓴 다산작가, 여성으로서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 중국에서 자랐고 동서양의 벽을 허물고 인류전체의 복지 사회를 꿈꾸었던 평화주의 작가 등, 펄 벅을 따라..
서산 마루에 낙조 드리우고 땅거미 내리는 시각이면 막연히 기다리는 전화가 있다. 요즘에는 인터넷이 있어 메일로 소식을 주고받는데도 전화를 기다리는 것은 산영 선생이 준 선물이다. 내가 서울에 살 때, 선생은 사무실을 차리고 출퇴근한 일이 있다. 해질녘이면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하면 "지금 뭐하세요?" 하는 나지막한 목소리. 저녁밥을 짓다가 물 묻은 손으로 수화기를 잡으면 목소리보다 먼저 전해지는 울림이 있었다. 나는 짐짓 딴청을 피우며 왜 퇴근을 안 하느냐고 되묻고는 했다. 그간 우리의 만남도 적잖은 시간이 쌓였다. 어렸을 적 친구같이 만만하지 않고 젊은 날 친구처럼 뜨겁지는 않아도 가랑비에 옷 젖듯 정이 들었나, 어떤 날은 글 스승으로, 사모하는 연인으로, 또 어떤 날은 동기간 같은 정으로 ..
북인도 바라나시에 머물 때였다. 아침이면 나는 갠지스 강변의 메인 가트에 가서 앉아 있곤 했다. 그곳에는 나말고도 한 인도 여인이 앉아 있었다. 사십대 중반의 그 여인은 더러운 붕대로 두 손을 감고, 늘 새처럼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메인 가트는 성지 바라나시의 중심에 해당하는 곳이어서, 인도 각지에서 온 순례자들이 아침마다 북새통을 이루었다. 또한 온갖 종류의 장사꾼들과 호객꾼, 걸인과 성자들로 발디딜틈조차 없었다. 바로 그곳에 날마다 한 거지 여인이 앉아 있었다. 나는 그녀가 누구와 말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아무도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그녀 역시 색 바랜 낡은 옷을 걸치고 있었지만 스스로 구걸을 하거나 하다못해 짜이(인도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차)를 청하는 적도 없었다. 그녀는 ..
고독하고 답답할 적에 맞아주는 벗이 있으니, 바람이다. 한마디 말하지 않아도 천언만감(千言萬感)을 주고받을 수 있는 유일한 벗은 바람뿐이다. 바람을 쐰다는 것은 바람과의 동행을 말한다. 바람과 함께 걸어 산책길에 나서면 마음이 온유해 진다. 심신을 파고들어 속속들이 안아주는 애인이 있으니, 바람이다. 머리카락에서부터 발끝까지 포근히 껴안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는 바람에게 전신과 영혼을 맡길 수 있으니 행복하다. 곁에 아무도 없어도 함께 산책길에 나서는 동반자가 있으니, 바람이다. 천진한 언어로 주고받으며 무작정 걸어갈 수 있으니 좋다. 손을 잡거나 어깨동무를 하지 않아도 서로 온몸을 맡기며 영혼 교감을 나누면서 걸을 수 있다. 형언할 수 없는 신비의 촉감 언어를 지녔으니, 바람이다. 눈동자 속으로, 코와..
미명의 새벽이었다. 그러나 그냥 누워 있을 수가 없다. 더구나 어디선가 자꾸만 나를 부르는 것만 같다. 아내를 깨워 호텔 문을 나섰다. 2월의 싸아한 새벽 공기가 채 맑아지지 못한 내 정신을 씻겨 준다. 어둠 속의 공기는 차갑기보다 상쾌하게 느껴졌다. 문을 열자 들려오는 하늘을 울리는 소리, 어둠 속이건만 큰 울림의 실체로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는 물줄이 보이는 듯 했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불켜진 가로등 하나가 너무 이르지 않느냐고 걱정스런 눈길을 보내온다. 녹지 못한 눈이 가로등 불빛에 반사되어 어둠을 밝히는 마른 잔디밭을 가로질러 100여 미터쯤을 내려가니 어둠을 뚫고 더욱 귀가 멍멍해지게 소리가 커진다. 조금씩 어둠이 옅어지고 있는 강가인데 물소리는 더 커져 가는 것만 같다. 헌데..
눈에 보이는 것은 마음에 얼마나 크게 영향을 미칠까요. 지금은 공사중인 건물에 가려져 버렸지만 얼마 전까지는 방에 누워서도 창만 향하면 하늘과 산이 그대로 한 폭 그림이 되어주곤 했습니다. 창에 하나 가득 안겨오는, 그림같이 펼쳐진 산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왠지 마음이 넉넉해지고 편안해 졌습니다. 나의 소유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산이건만 내 것처럼 바라볼 수 있다는 것, 아니 그 어떤 생각도 없이 그저 산을 바라본다는 것만으로도 알 수 없는 행복감에 젖을 수 있는 것은 욕심을 내지 않음에서 얻어지는 편안함이 아니었을까싶습니다. 내 소유가 아니기에 오히려 맘껏 바라보고 즐길 수 있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내 것이었으면 하고 욕심을 내게 되는 순간 누리고 있던 잔잔한 기쁨과 넉넉한 여유를 빼앗기고 만다는 것이..
우리집 정원에는 지난 1년 동안 시들했다가 생기를 되찾은 수국 한 그루가 있다. 나는 꽃나무의 생리를 잘 몰라 별로 손질해 주지는 못했지만 이 수국은 지난해 삿갓 모양의 넙죽한 향나무 밑에서 호된 홍역을 치뤄 하마터면 죽을 뻔한 것을 아내의 정성스러운 손길로 옮겨 심어 가까스로 기사회생시킨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올해는 꽤 싱싱하게 자랐는데도 다른 집의 풍성한 수국보다는 포기가 적고 나이는 그럭저럭 5년째로 접어든다. 다른 수국 같으면 벌써 꽃송이가 만발했을 때다. 그런데 요즈음에 와서야 겨우 한 송이 피었는데 그 꽃의 빛깔은 바로 내가 좋아하는 연보라빛이었고 그 크기는 제법 밥사발만 하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겨우 한 송이 핀 꽃이 올바른 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그 무성한 잎새에 가려진 채 고개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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