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백설희 선생이 부른 노래 ‘봄날은 간다.’를 애창한다. 심금을 울리기 때문이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 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마단조 블루스 곡이 애절한 가사와 흐느끼는 듯 슬픈 곡조가 서로 어울려서 눈물겨운 노래가 되었다. 봄바람은 참 변덕스럽다. 어루만지듯이 살랑대다가도 어느 순간에 북풍이 되어 살을 파고들기도 한다. 살랑대며 낯을 간질이듯이 불 때에는 외로운 처녀 총각의 가슴이 두근거리게 불을 지핀다. 방안에 가만히 틀어박혀 있지를 못하게 유혹하여 밖으로 끌어낸다. 더구나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는 처녀를 보고도 목석이 아닌 이상 어찌 설레지 않을까? 가슴이 뜨거워지고..
한 알의 무게는 작은 새의 깃털과 같고, 크기는 모래알 다음 가나, 향미(香味)로는 따를 것이 없어 이 세상 으뜸이다. 부부의 정이 도탑거나 재미있어 죽을 지경이면 '깨가 쏟아진다'하고, 배알이 뒤틀릴 때 상대방이 코 깨질 일이라도 생기면 '깨소금 맛'이라 함은 그 까닭이다. 고기 맛만 최고인가, 산 녘과 들녘에 지천인 나물을 뜯어 삶아 참기름 한 방울 치면 밥 한 그릇도 뚝딱, 그도 저도 마땅찮을 때는 맨 간장에라도 한 방울 둘러치면 그 맛도 괜찮다. 상찬에도 깨맛과 참기름 향이 빠지면 맨송맨송 하찬으로 등락하고, 하찬도 참기름 진향(珍香)이 돌면 상찬이 된다. 곡물이나, 기묘한 향미로 그 값은 천정이다. 금값이나 사향 값보다야 못하지만, 곡물로는 최상으로 매겨지니 물물교환에 고가품으로 농가에서는 보물..
부지깽이 하나 가지고 싶다. 잠시 쓰고 버리는 부지깽이가 아니라 내 인생 길에 동반할 부지깽이 하나 가지고 싶다. 굵기도 길이도 딱 맞아서 내 손 안에 착 안기는 부지깽이. 필요할 때면 언제나 가까운 곳에 있어서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부지깽이. 특별히 대가를 치를 필요도 없고 대접할 필요도 없으며, 보관할 장소를 마련하지 않아도 되는 가장 만만한 물건. 행여 없어진다 해도 별로 아깝지도 않으며 찾으려고 애쓰지도 않는 부지깽이, 그것 하나 가지고 싶다. 부지깽이는 불을 땔 때에 아궁이의 불을 헤집는 막대기다. 필요하면 아무 막대기나 꺾어서 쓰다가 아무 곳에나 팽개치다시피 던져놓는 막대기다. 그래도 그것이 없이는 불을 제대로 땔 수 없는 꼭 필요한 물건이다. 부지깽이는 하찮은 물건이지만 쓸 수 있는 용도는 ..
전주 시가지 동편 끝. 기린봉 산줄기와 승암산, 그리고 이목대 사이에 낙수정이라는 곳이 있다. 이름 그대로 아주 조용한 곳이다. 내로라는 지관이 자리를 잡았음직한 군경 묘지가 이곳에 있으니 그만하면 터도 명당인 셈이다. 그런데 이곳에 잘 사는 사람은 없으니 옛 사람들이 명당을 통하여 후손들에게 내리고자 했던 복이, 돈을 많이 벌어 부자로 살라는 것은 아니었던가 보다. 그러나 인심은 후해서 시골 냄새, 고향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으로 고향을 떠나 도회지에 와서 자리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고향 떠난 설움을 이 곳에서나마 서로 달래 주며 위로 받게 했으니 옛 사람들의 뜻이 여기에 있었던가 보다. 이곳은 대부분의 집들이 산중턱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달동네다. 이곳에서 살다가 돈이 좀 모아지면 이..
과일은 언제나 색깔로 찾아온다. 마트에도 노점에도 골목길 과일 트럭에도 봉긋한 참외가 지천으로 노란 물을 덮어쓰고 앉았다. 이제는 제철이라는 말이 무색하지만 내 과일 달력은 딸기의 봄빛이 지나고 수박이 붉은 속을 채우는 사이에 금쪽같은 참외의 계절이 펼쳐진다. 집 앞 과일 가게에도 며칠 전부터 황금빛 줄무늬 참외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판다. 마치 참외밭 한 이랑을 통째로 옮겨놓은 듯 착시가 인다. 바다오리알 같은 둥그레한 열매들이 열대 과일 사이에서도 당당하고 옹골차다. ‘금싸라기 참외’라는 상표를 붙인 것도 땅심을 향한 경배의 마음이 담겼으리라. 선이 반듯하고 골이 옴폭 파인 주먹만 한 참외를 몇 개 골라 담았다. 식탁 위에 펼쳐놓은 샛노란 열매가 프리지어 꽃빛보다 곱다. 저 어리고 어여쁜 것에 감히 ..
노을빛 곱게 물드는 저녁나절에 우연히 어느 낯선 농촌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멀찌감치 떨어져 보이는 외딴 집 굴뚝에서 향수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 때문인지 몇 가구 안 되는 마을의 정경이 고즈넉하기 그지없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이곳의 수호신인양 당당한 위풍으로 버티며 서 있는 한 그루의 거목, 바로 당수나무였다. 나는 그 앞에 이르러 가든 길을 멈춰 섰다. 동제를 지낸 지 며칠 되지 않았나 보다. 나무의 둘레를 휘감아 얼기설기 동여 놓은 금줄이며 주변 바닥에 잔뜩 부려 놓은 황토의 선명한 빛깔로 하여 언뜻 그 곁에 다가서지를 못하고서 서성거렸다. 나는 금줄에 매달린 한지조각들이 간간이 스치는 바람에 나풀거리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아득히 멀어진 세월 때문일까...
하얀 소 신축년(辛丑年)이 동산위에 떠 오른지도 한 달, 유난히 춥고 눈도 자주 내리고 있다. 멈추지 않는 ‘코로나19’와 매서운 한파로 세상은 얼어붙고, 사회적 거리두기로 외출이 자유롭지 못하다보니 대부분의 시간을 집안에서 보내고 있다. 햇볕이 맑고 포근한 날 답답하고 외로움을 떨치고자 덕진공원을 찾았다. 그 많던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텅 빈 공원에는 나목이 오돌 오돌 떨고, 화려했던 연꽃은 허리꺾기고 물에 잠겨 쓸쓸하고 애처롭다, 생을 다한 흑갈색 연잎에서 일평생 농사를 지으며 희생으로 주름진 촌노의 얼굴을 떠 올린다. 덕진 연못은 본래 건지산 계곡의 물이 고인 연꽃 피는 자그마한 늪지였는데, 건지산과 가련산 사이에 제방을 쌓으면서 커다란 연못으로 변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전주의 지세가 ..
물은 맛이 없다. 가장 좋은 물이란 맛은 물론 색깔도 냄새도 없는 물이다. 그럼에도 지친 나그네가 길가 옹달샘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야! 물맛 좋다.”고 감탄사를 터뜨린다. 맛없는 맛을 본 것이다. 깊은 산 속 암자에서 수행 중인 한 노스님이 한겨울 녹차가 떨어졌는데 눈이 쌓여 구하러 나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맑은 청수를 끓여 녹차 잔에 따라 마시면서 “녹차 맛이 은은하다.”고 했다는 일화를 읽은 적이 있다. 물맛을 녹차 맛으로 착각한 것이다. 물은 맛이 없지만, 모든 음식에 맛을 내준다. 만일 물에 맛이 있다면 음식이 제 맛을 낼 수 있을까? 결국 모든 음식은 물맛이다. 좀 지나친 발상일지 모르겠다. 베풂도 이와 같다. 진정한 베풂은 ‘베풂 없는 베풂’이다. 연말연시 이웃돕기 성금을 비롯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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