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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붕딤이산(부엉이산) 아래 가실마을은 단아하다. 아치형의 나무 터널을 벗어나자 고요하고 평화로운 풍경이 다가온다. 널찍한 주차장을 지나면 신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붉은 벽돌 성당이 고풍스럽게 서 있다. 백 년 성상이 서린 가실성당이다. 가실성당 정문 앞에 있는 작은 녹원이 눈을 끌어당긴다.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잔디밭이며 잘 가꾼 수목이며 여느 집 뜨락처럼 단정하게 꾸며진 정원이다. 한티재로 안내하는 표지판, 방문을 확인하는 스탬프를 담은 작은 집, 하얀 조각상을 중심으로 둘러쳐진 작은 나무들. 모든 권위를 내려놓은 주인장처럼 친절하게 나를 맞는다. 성당 앞 정원의 배롱나무 가지마다 붉은 꽃이 가득하다. 내가 찾는 배롱나무다. 오래도록 가실성당의 역사를 목도한 나무로..
어둑어둑할 때 대문을 들어섰다. 배가 고팠다. 어머니부터 찾았다. 그녀는 부엌에도 없었고 뒤뜰에도 보이지 않았다. 벼 퉁가리를 돌아 돼지막과 소막을 지나 옆집 숙부댁도 들러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저녁밥을 먹고 치웠는지 부엌에서 일하는 아줌마도 보이지 않았다. 시골의 밤은 일찍 어둠이 내렸고 저녁밥도 일찍 먹었다. 방마다 불이 하나씩 켜져 갔다. 스물한 명이나 되는 식구들의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큰 집은 적요했다. 앞뜰과 장독대도 적요했고 능소화도 적요하기만 했다. 어머니는 집안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동생들에게 물어보고, 어른들에게도 물어봤지만 대답해주는 이는 없었다. 약방에서 담뱃대로 재떨이를 두드리는 소리만 들렸다. 할아버지는 무심한 얼굴이었다. 순간 사단(事端)이 났음을 알았다. 어머니..
볕 좋은 이런 날은 평소 즐기지 않던 원두커피 한 잔마저 향기롭다. 창가에 앉아 우두커니 음미하는 가을 냄새가 짙다. 창 너머로 머지않아 다가올 겨울이 하얗게 겹친다. 문득 찻잔 속 찰랑거리는 내 얼굴에도 표정이 겹친다. 깊이를 알 수 없지만 낯익다. 평온해 보이는 저수지에 낚싯대를 드리운 등은 고요한 듯 시끄러워 보였다. 찌를 지켜보고 있을 눈빛이 불쑥 돌아볼 것 같았지만 아버지의 등은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5·16을 맞으며 군청의 주사 직함을 놓게 되었다. 하루아침에 쫓겨난 것이다. 국졸(國卒) 학력은 새 시대에 걸맞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가장의 몫은 어머니에게로 넘겨졌고, 아버지는 오래도록 안타까운 세월만 낚고 있었다. 절망과 분노와 회한이 뒤섞인 낚싯밥을 덥석 물어줄 물고기는 없어 ..
2016 천강문학상 우수상 장롱 한 짝을 들였다. 친정집 창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자리만 차지하던 장롱이다. 앞은 느티나무에 옆과 뒤는 오동나무로 된 전통 방식의 맞춤이다. 비록 유행이 지나고 낡았지만 합판에 무늬 필름을 덧씌운 가구보다 나을 것 같았다. 장롱은 부모님과 오래도록 한 방에서 숨을 쉬었다. 연륜이 있는 물건으니 내력을 품어서 그런지 곳곳에 부모님의 숨소리가 배어있는 듯하다. 두런두런 나누는 말이며 갸릉갸릉 가래소리와 쿨럭쿨럭 기침소리 그리고 얼굴에 새겨진 주름까지 느껴진다. 물걸레로 닦고 광택제로 문지르자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삶의 무늬가 깨어난다. 물결일까, 바람의 무늬일까. 아니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세상의 등고선일까. 이쪽에서는 산모롱이를 지나는 물처럼 유려하게 휘돌고 저쪽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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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예천 용문사는 소백산의 깊은 품속에 자리 잡고 있다. 바람의 지문이 선명하게 찍혀 있는 단풍나무 사이를 걸으며 생각의 깃을 세운다. 나직이 속살거리는 나무의 이야기를 음미하다 보니, 어느새 회전문 앞이다. 합장한 채로 자운루를 올려다본다. 임진왜란 때 승병들의 회담 장소로 호국불교의 정신을 되새길 수 있는 곳이다. 호국의 염원이 응집된 소리들을 내 마음속에 받아 적으며 대장전으로 향한다. 용문사에 도착하면 할머니는 곧장 대장전을 찾았다. 팔만대장경의 일부를 보관하기 위해 세운 전각으로 그 자체가 보물이다. 대장전 안에는 4개의 보물이 모셔져 있다. 손 회전식 경장인 윤장대 2좌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용문사에만 남아 있고, 목각후불탱,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은 지금까..
유년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나가다가 혼자 웃을 때가 있다. 두살 아래인 동생이 기저귀를 차고 마당에서 엉금엉금 기어 다니다가 닭똥을 주워 먹던 일 따위를 떠올릴 때가 그런 경우인데, 이처럼 하찮은 일은 기억을 하면서도 정작 있었을 법한 일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떠오르는 것이 없어 안타까울 때도 있다. 아버지는 나이 삼십이 되어서야 나를 낳았다. 아버지에게는 형님이 두 분 있었지만 큰형님은 딸만 둘을 두고 일찍 세상을 떠나셨고, 둘째 형님은 만주를 떠돌면서 소식조차 없던 터라 형님들을 대신하여 부모님을 모시던 아버지로서는 대를 이을 책무까지 다한 셈이었다. 사정이 그러했던 만큼 조부모님을 비롯한 가족들의 나에 대한 사랑은 내 기억으로도 대단한 것이었다. 둘때 고모는 시집을 가서도 내 생각이 나서 울었다..
이른 아침, 뒤뜰에 하얀 꽃비가 내린다. 매화는 꽃 지는 모습마저 곱다. 꽃샘바람 냉기를 타고 나비처럼 허공에 유유하다 자늑자늑 땅으로 내려앉는다. 떠날 때를 알고 제 갈 길을 찾는 매화의 홀연한 발걸음이 마음 한 자락을 붙잡는다. 꽃잎인들 아픔이 없을까. 꽃잎들이 떠난 빈자리를 유심히 살핀다. 소중함은 가벼이 드러내지 앉는 법, 무시로 찾아드는 비바람의 궂은 심술에도 온 힘 다해 꼭꼭 부여잡고 있던 자리이다. 꽃잎 떠나는 날 비로소 잡고 있던 손 내려놓고 잠시 숨 고르는 겸손한 꽃. 화려함은 없지만 뽀얀 솜털 보송보송한 또 하나의 새 생명을 잉태할 그 곳이다. 떠나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일까? 여태껏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던 자리를 찬찬히 보고 또 살핀다. 빨갛게 멍든 꽃자리가 오늘은 눈물겹도록 그리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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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잠을 앗아 간 더위와 싸우다 문득 오래전 어머님이 장만해 주신 삼베 홑이불이 생각났다. 이제는 낡아서 군데군데 구멍이 뚫렸지만, 침대 위에 깔아 놓으니 등으로 서늘한 바람이 일렁인다. 며느리 여름나기까지 자상하게 살피던 어머님을 회상하며 안동시 임하면 금소리 안동포 마을을 찾았다. 시골 동네는 겉보기에 고요한 듯하다. 가만히 서 있는 나무줄기 속에 물과 양분이 끊임없이 이동하듯 내면에는 끈끈한 전통이 흐르는 기운을 느낀다. 마을을 안은 비봉산 산봉우리는 봉황이 날개를 펴고 있는 듯하다. 산 아래로 비단 폭을 펼쳐놓은 것 같은 길안천이 너른 들판을 적시며 여유롭게 흐른다. 거리에는 인적이 뜸하다. 한낮의 맑고 투명한 햇살이 부담스러운가 보다. 농가의 이끼 낀 기와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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