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집 / 성찬경 呪文 찍힌 잡동사니가/ 탑처럼 쌓이는 유기질 동굴./ 드러누우면/ 북통만한 방이 슬그머니 늘어나/ 팔 다리 뻗을 자리가 열리고/ 내가 찾는 개미 句節이/ 먼지 덮힌 책 갈피에서 기어나오고/ 구불구불 굴절하는 틈서리로/ 달빛이 스민다./ 빗방울이 천정에 海圖를 그리고/ 어린 것들은/ 유년의 마술로 기적 소리를 내며/ 책상 다리 사이로 만국 유람을 한다./ 별구경이나 할까./ 한밤중에 뜰에 나서면/ 나의 外皮인 식물들이 독 바람 속에서도/ 말 없이 푸른 호흡을 하고 있다./ 다행히 가난이 나의 편을 들어주어/ 집이 좁아질수록/ 깊이 뻗는 뿌리.// 나의 별아 / 성찬경 나의 별아./ 너 지금 어디에 있니?/ 내가 아무리 찾아도 나타나지 않는/ 나의 별아./ 너 지금 어디에 있니?// 나의..

멀리 있는 무덤 -金洙暎 祭日에 / 김영태 희망의 문학/ 6월 16일 그대 제일(祭日)에/ 나는 번번이 이유를 달고 가지 못했지/ 무덤이 있는 언덕으로 가던/ 좁은 잡초길엔 풀꽃들이 그대로 지천으로 피어 있겠지/ 금년에도 나는 생시와 같이 그대를 만나러/ 풀꽃 위에 발자국을 남기지 못할 것 같아/ 대신에 山 아래 사는/ 아직도 정결하고 착한 누이에게/ 시집(詩集) 한 권을 등기로 붙였지/ 객초(客草)라는 몹쓸 책이지/ 상소리가 더러 나오는 한심한 글들이지/ 첫 페이지를 열면/ 그대에게 보낸 저녁 미사곡이 나오지/ 표지를 보면 그대는 저절로 웃음이 날 거야/ 나같은 똥통이 사람 돼 간다고/ 사뭇 반가워할 거야/ 물에 빠진 사람이 적삼을 입은 채/ 허우적 허우적거리지/ 말이 그렇지 적삼이랑 어깨는 잠기고/ ..

벼 / 이성부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와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넓은 사랑/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 묻은 그리움/ 이 넉넉한 힘.// 우리들의 양식(糧食) / 이성부 모두 서둘고, 침략처럼 활발한 저녁/ 내 손은 외국산 베니어를 만지면서/ 귀가하는 길목의 허름한 자유와/ 뿌리 깊은 거리와 식사와/ 거기 모인..

기항지(寄港地) 1 / 황동규 걸어서 항구(港口)에 도착했다.// 길게 부는 한지(寒地)의 바람/ 바다 앞의 집들을 흔들고/ 긴 눈 내릴 듯/ 낮게 낮게 비치는 불빛// 지전(紙錢)에 그려진 반듯한 그림을/ 주머니에 구겨 넣고/ 반쯤 탄 담배를 그림자처럼 꺼 버리고/ 조용한 마음으로/ 배 있는 데로 내려간다.// 정박중의 어두운 용골(龍骨)들이/ 모두 고개를 들고/ 항구의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두운 하늘에는 수삼개(數三個)의 눈송이/ 하늘의 새들이 따르고 있었다.// 기항지(寄港地) 2 / 황동규 다색(多色)의 새벽 하늘/ 두고 갈 것은 없다, 선창에 불빛 흘리는 낯익은 배의 구도(構圖)/ 밧줄을 푸는 늙은 뱃군의 실루에트/ 출렁이며 끊기는 새벽 하늘/ 뱃고동이 운다/ 선짓국집 밖은 새벽 취기/..

풀 / 김종해 사람들이 하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풀이 되어 엎드렸다/ 풀이 되니까/ 하늘은 하늘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햇살은 햇살대로/ 내 몸속으로 들어와 풀이 되었다/ 나는 어젯밤 또 풀을 낳았다// 잡초뽑기 / 김종해 호미로 흙을 파면서/ 잡초를 뽑는다/ 잡초들은 내 손으로 어김없이 뽑혀지고/ 뽑혀진 잡초들은 장외場外로 사라진다/ 옥석玉石을 구분하는 나의 손도 떨린다/ 하늘은 이 잡초를 길러내셨으나/ 오늘은 내가 뽑아내고 있다/ 밭을 절반쯤 매면서/ 문득 나는 깨달았다/ 이 밭에서 잡초로 뽑혀나갈 명단 속에/ 아, 어느새 내 이름도 들어가 있구나!// 가족모임 / 김종해 우리는 섬으로 가야 한다/ 부산에 와 보면 알 수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섬으로 떠 있는 어머니./ 흰 파도가 어머니의 앞가슴에..

흐린 밤 볼펜으로 / 이승훈 흐린 밤 볼펜으로/ 이제 무엇을 쓰랴/ 흐리게 흐리게 무엇을 쓰랴// 무엇을 찾아/ 무엇을 찾아 쓰랴/ 서럽던 날들을 쓰랴/ 사라진 바다를/ 바다 위의 구름을 쓰랴/ 용서하랴 부서지랴// 축복받은 날들은/ 모조리 아름답던 날들/ 이렇게 흐린 밤/ 목메이는 밤/ 무엇을 쓰랴// 이 백지같은 외롬/ 마음껏 찢어지는 외롬/ 하염없는 날들만 하염없으니/ 영원히 저무는 병원 하나만/ 노적처럼 흔들리는 방에서// 사랑했던 사람아/ 흐린 밤 볼펜으로/ 이제 무엇을 쓰랴/ 떠날 수 없고/ 머물 수 없으니/ 바위같은 가슴이나 울리면서/ 이제 무엇을 쓰랴// 풍선기 1호 -신동문의 「풍선기 1호」를 모방하여 / 이승훈 초원처럼 넓은 강의실에 선 채 나는 아침부터 기진맥진한다 하루 종일 수없이 ..

산양 / 이건청 아버지의 등 뒤에 벼랑이 보인다/ 아니 아버지는 안보이고 벼랑만 보인다/ 요즘엔 선연히 보인다.// 옛날 나는 아버지가 산인 줄 알았다/ 차령산맥이나 낭림산맥인 줄 알았다/ 장대한 능선은 모두가 아버지인 줄 알았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푸른 이끼를 스쳐간 그 산의 물이 흐르고 흘러/ 바다에 닿는 것이라고/ 수평선에 해가 뜨고 하늘도 열리는 것이라고// 그때 나는 뒷짐지고 아버지 뒤를 따라 갔었다/ 아버지가 아들인 내가 밟아야 할 비탈들을 앞장서 가시면서/ 당신 몸으로 끌어안아 들이고 있는 걸 몰랐다/ 아들의 비탈들을 모두 끌어안은 채/ 까마득한 벼랑으로 쫓기고 계신 걸 나는 몰랐었다// 나 이제 늙은 짐승 되어 힘겨운 벼랑에 서서 뒤돌아보니/ 뒷짐지고 내 뒤를 따르는 낯익은 얼굴 하..

만종(晩鐘) / 고창환 호박엿 파는 젊은 부부/ 외진 길가에 손수레 세워놓고/ 열심히 호박엿 자른다/ 사는 사람 아무도 없는데/ 어쩌자구 자꾸 잘라내는 것일까/ 그을린 사내 얼굴/ 타다 만 저 들판 닮았다/ 한솥 가득 끓어올랐을 엿빛으로/ 어린 아내의 볼 달아오른다/ 잘려나간 엿처럼 지나간 세월/ 끈적거리며 달라붙는다/ 그들이 꿈꿔왔을/ 호박엿보다 단단한 삶의 조각들/ 삐걱이는 손수레 위 수북이 쌓인다/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는데/ 그들이 잘라내는 적막한 꿈들/ 챙강대는 가위 소리/ 저녁 공기 틈새로 둥글게 퍼진다// 시인의 산문 / 고창환 한때 의도적으로 삶의 따뜻함을 지향했던 적이 있었다. 그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또 많은 시간들을 보내야 했다. 어떤 삶도 의도적일 수 없다는, 그 우연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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