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 詩' / 山을 향한 詩 54편을 추린 시집 - 시인 생전인 1999년에 출간한 것을 2013년 (시와시학사)에서 다시 다듬어냈다. 저녁밥 -山詩 1 / 이성선 나는 저 산을 모른다// 모르는 산 속에 숨어 피는 꽃/ 그것이 나의 저녁밥이다// 귀를 씻다 -山詩 2 / 이성선 산이 지나가다가 잠깐/ 물가에 앉아 귀를 씻는다// 그 아래 엎드려 물을 마시니/ 입에서 산(山)향기가 난다// 생을 탕진 하고도 -山詩 3 / 이성선 안개 속 높이 솟은 산에/ 잃은 소 찾으러 간다// 일생을 탕진 하고도 안되어/ 늙어 구름 골을 아직 헤맨다.// 천후우 울음 -山詩 4 / 이성선 저녁 산에서/ 소 울음소리가 크게 들려/ 고개를 돌리니// 수천 마리 소가 등을 맞대고 가는/ 산 능선들 가운데서/ 달마가 천후우天..
그리움에 기립(起立)하다 / 이수익 내 몸의 일부는 당신의 것이다/ 당신과 함께 나눈 음식,/ 내 영혼의 일부는 당신의 것이다/ 당신과 함께 나눈 대화,// 당신은 달처럼/ 나도 달처럼// 멀리 떨어져서 더욱 환히 보이는/ 생각,/ 푸른 추억의 빵 하얀 스푼// 사랑이 주고 간 對話 / 이수익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가/ 능금나무 아래서/ 터질듯한 풍선을 만지고 있다// 햇빛은/ 신문지의 행간을 교묘히 빠져나오는/ 냄새처럼/ 잎사귀의 저 멀리서 스미어 오데.// 성숙한 두 사람의 볼은/ 잘 빚은 능금주,/ 제왕의 잔을 찰찰 넘치는/ 요염으로 발그레져 있데.// 서로 말하지 않는/ 두 사람의 시선이/ 한 사람의 약속 위에 머물 때/ 배암의 요설은/ 분과 연지를 찍고/ 한 사람이 손이 그만,/ 공중에 풍선을 놓..
묘비명(墓碑銘) / 김광규 한 줄의 시는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 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굳굳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사료(史料)가 될 것이니/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시인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마포 강변 동네에서 / 김정환 해마다 장마때면 이곳은 홍수에 잠기고/ 지나간 물살에 깎인 산허리 드러낸 몸을 보면서/ 억새는 자란다 그 홍수 치른 여름 강가 태우는 땡볕/ 억새는 자란다 떠내려가는 흙탕물은 한없어/ 영영 성난 바다만 같아 보이고/ 움켜도 움켜도 움켜잡히지 않는 발 아래 한줌의 흙/ 뿌리는 이대로 영영 이별만 같아 보이고/ 죽음같이 빨려들어가고만 싶은 진흙창 속으로/ 그러나 억새는 자란다 기어들 듯 말 듯/ 모기 같은 속삭임으로 땅에게 마지막 이별에게/ 가지 마셔요 저는 당신의 애기를 가졌어요 당신처럼 설움뿐이지만/ 당신처럼 활활 타오르는, 당신처럼 언제나 떠나가고 싶어하지만/ 당신처럼 제 뇌리에서 지워드릴 수 없는/ 질긴 생명의 씨앗이 제 안에서 꿈틀대고 있어요/ 모두 당신 거예요 이 흠..
낡은 집 / 최두석 귀향이라는 말을 매우 어설퍼하며 마당에 들어서니 다리를 저는 오리 한 마리 유난히 허둥대며 두엄자리로 도망간다. 나의 부모인 농부 내외와 그들의 딸이 사는 슬레트 흙담집, 겨울 해어름의 집안엔 아무도 없고 방바닥은 선뜩한 냉돌이다. 여덟 자 방구석엔 고구마 뒤주가 여전하며 벽에 메주가 매달려 서로 박치기 한다. 허리 굽은 어머니는 냇가 빨래터에서 오셔서 콩깍지로 군불을 피우고 동생은 면에 있는 중학교에서 돌아와 반가워한다. 닭똥으로 비료를 만드는 공장에 나가 일당 서울 광주간 차비 정도를 버는 아버지는 한참 어두워서야 귀가해 장남의 절을 받고, 가을에 이웃의 터밭에 나갔다 팔매질당한 다리 병신 오리를 잡는다//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 최두석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무슨 꽃..
아비라는 새의 울음소리는 늑대와 같다 / 박정대 아침마다 아비라는 새가 와서 울면/ 늑대가 우는 줄 알았다/ 가끔은 사람이 웃는 줄 알았다/ 간밤 늦게까지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다 잠이 들었다/ 창밖엔 눈이 내렸는지 온통 하얀데/ 아침부터 동백나무 숲이 창가로 와/ 나를 깨우며 우는 줄 알았다// 바닥에 털썩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한 잔의 차를 마시며/ 빅또르 쪼이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신고 있는 운동화가 지나온 길을 말해주었다/ 팔에 돋아난 힘줄은 알타이산맥보다 더 선명했다/ 그가 마시던 잔에는 어떤 노래가 담겨 있었던 걸까/ 그는 한 잔의 차를 마시며 또 다시/ 다음에 부를 노래를 생각했을 것이다// 아침마다 아비라는 새가 와서 울면/ 늑대가 우는 줄 알았다/ 가끔은 그가 ..
황금나무 아래서 / 권혁웅 황금나무를 본다/ 저 나무는 세계수, 하늘을 향해 직립한 채/ 부채 모양의 금빛 엽편(葉片)들을 쏟아낸다// 나무가 이곳에 뿌리내린 것은 아주 오래 전이다/ 저 금빛 환상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나무 위에 집을 짓는 족속이었을까// 아까부터 젊은 연인들이 서로의 손을 잡고/ 제단에 앉아 있다 저 신성한 이들의 황금시대를/ 기록할 문자가 나에겐 없다// 다만 나는 내 안에 기식하는 너무 많은 것들을/ 금빛 바람 위에 실어 보낼 뿐이다// 내 몸을 온통 물들이는 황금나무를 보며/ 나도 몇 번의 제의를 거쳐 온 듯하다/ 마르고 헐벗은 가지가 푸르고 노란빛으로/ 거듭 생을 치장하는 동안/ 내게도 두어 편 격절과 비약의 연대기가 있었다/ 이제 나무에 기대어 나는 내가 꾼 꿈들이/ 신..
감옥 / 강연호 그는 오늘도 아내를 가두고 집을 나선다/ 문단속 잘 해, 아내는 건성 듣는다/ 갇힌 줄도 모르고 노상 즐겁다/ 라랄랄라 그릇을 씻고 청소를 하고/ 걸레를 빨며 정오의 희망곡을 들으며/ 하루가 지나간다 나이 들수록 해가 짧아지네/ 아내는 제법 철학적이기까지 하다/ 상추를 씻고 된장을 풀고 쌀을 안치는데/ 고장난 가로등이나 공원 근처/ 그는 집으로 가는 출구를 찾지 못해 헤맨다/ 그는 혼자 술을 마신다/ 그는 오늘도 집 밖의 세상에 갇혀 운다// 비단길 1 / 강연호 내 밀려서라도 가야 한다면/ 이름만이로라도 아름다워야지 비단길/ 허나 지나는 마음 쓸쓸하여 영 자갈밭일 때/ 저기 길을 끌어가는 덤불숲 사이로/ 언뜻 몸 감추는 세월의 뒷모습 보인다/ 저렇게 언제나 몇 걸음 앞서 장난치며/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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