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한 술이 건너온다. 한번은 정이 없다고 또 한 술, 재빠른 눈치에 형식적인 거절을 할 수가 없다. 솔직히 말하면 덤을 즐긴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남는 것을 주는 것은 덤이 아니다. 자신의 것을 에누리해 상대에게 더해주는 기꺼움이 들어있는 덤은, 성과에 따라 지급하는 보너스와는 다르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덤을 받았는가.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것들. 생각해보면, 내가 누린 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오랜 기억을 뒤질 때면 뭉클하게 다가오는 고향. 안정감과 순박함을 덤으로 얹어준 강릉은 백두대간의 줄기인 대관령이 감싸 안고 동해바다가 아우르고 있다. 젖비린내와 그리움을 동시에 물려주던 곳. 내 성정의 8할을 이루어준 매혹의 땅, 강인함을 가르치고 너른 마음을 키워준 그곳에서 무른 뼈는 단단해졌다. 눈..

꽃씨 / 문병란 가을날/ 빈손에 받아 든 작은 꽃씨 한 알!// 그 숱한 잎이며 꽃이며/ 찬란한 빛깔이 사라진 다음/ 오직 한 알의 꽃씨 속에 모여든 가을.// 빛나는 여름의 오후,/ 핏빛 꽃들의 몸부림과/ 뜨거운 노을의 입김이 여물어/ 하나의 무게로 만져지는 것일까.// 비애의 껍질을 모아 불태워버리면/ 갑자기 뜰이 넓어가는 가을날/ 내 마음 어느 깊이에서도/ 고이 여물어가는 빛나는 외로움!// 오늘은 한 알의 꽃씨를 골라/ 기인 기다림의 창변에/ 화려한 어젯날의 대화를 묻는다.// 꽃에게 / 문병란 차라리 마지막 옷을 벗어버려라.// 밤마다 비밀을 감추고/ 마지막 부분,/ 부끄러운 데를 가리우던/ 그날부터,// 내 앞에 위태롭게 서 있던 자태,// 너를 탐내는 눈 앞에/ 너를 더듬어 찾는 음모의 손길..

번역문과 원문 걸인이 부처요, 부처가 걸인이니 처지를 바꾸어 공평히 보면 모두가 한 몸이라. 불상 아래 뜰 앞에서 사람들은 떠받드는데 걸인과 부처 중에 누가 진짜인 줄 알리오? 乞人如佛佛如人 걸인여불불여인 易地均看是一身 역지균간시일신 佛下庭前人上揭 불하정전인상게 乞人尊佛辨誰眞 걸인존불변수진 - 권섭(權燮, 1671~1759), 『옥소고(玉所稿) • 시(詩)』 13 「거지라고 업신여기지 말라[乞人不可慢視]」 해 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우리 사회는 안 그래도 심해지던 양극화 현상이 더욱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2020년 8월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03년 통계 작성 이래 처음으로 임금노동자 11만 3천 명이 줄었다고 합니다. 특히 고용 안정성이 취약한 비정규직, 그 가운데..
사람은 다면체 존재다. 앞모습이 다르고 뒷모습이 다르다. 빛을 받을 때 모습이 다르고 응달에 있을 때 모습이 다르다. 마음이나 인격도 겉모습처럼 상황에 따라 팔색조가 될 수 있는 게 사람이다. 우리는 그걸 가끔 잊고 산다. 의사로부터 백혈병이란 선고를 받은 남편을 입원시킨 날 그녀를 만났다. 반쯤 나간 정신을 겨우 가누며 입원실에 들어섰을 때 그녀는 보호자가 침대에 앉아 커다란 천에 수를 놓고 있었다. 느닷없이 전학을 온 학생처럼 병실을 둘레거리는 우리를 보고 오랜 친구를 마중하듯 수틀을 던지고 짐을 받아 주었다. 조신하게 수를 놓는 친절한 여자가 처음 본 그녀의 단면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일 년 전에 골수이식을 했다가 재발이 된 환자였다. 골수이식만 하면 완치가 되는 줄 알고 있다가 날벼락을 맞은 것이..
연 분홍빛 소녀의 얼굴로 은은한 향을 풍기던 매화. 어느덧 매실이 되어 우리 집에 오게 되었다. 매실을 준비하는데, 오래 전 초례청에 들어서던 동갑내기 우리부부를 보는 듯 마음이 설렌다. 배가 불룩한 오지항아리는 매실의 초례청이다. 나는 주례를 맡았다. 신랑신부 맞절을 시키듯, 청실홍실을 다루듯, 매실 한 켜 설탕 한 켜 비율로 차곡차곡 항아리에 넣었다. 축하세례로 남은 설탕을 초록매실 위에 하얗게 뿌리고, 마지막 절차는 초야를 치를 합방만 남았다. 혹, 불길한 기운이라도 스밀 새라, 한지로 항아리 아가리를 딱 붙였다. 신방인 셈이다. 목화솜처럼 뽀얀 새 이부자리 위에 축사로 매화송이를 그릴까하다가 붓을 들어 시 한 수를 적었다. 獨倚山窓夜色寒 홀로 창에 기대니 밤빛이 차가운데 梅梢月上正團團 매화 가지에..
운명, 운명을 거부한다. 아니 거부하고 싶다. 하나 딸은 엄마 팔자를 닮는다는 속설이 겁났다. 어미는 밥 먹고 숭늉 마시듯, 습관적인 ‘박복’ 타령을 했다. “부모 복 없는 X은 서방 복도 없고…”, 그다음은 자식 복이 나올 차례다. 대물림을 피하느라 어미 앞에서 절절매며 어미의 엄마가 되었다. 갑을 병정 무기 경신 임계. 자축 인묘 진사 오미 신유 술해. 사람은 천간天干 지지地支의 육십갑자 순환으로 연월일시, 사주四柱가 정해진다. 제아무리 지혜롭고 총명해도 가난할 수가 있고, 어리석고 고질병을 지녔어도 부자일 수 있으니, 숙명처럼 운명도 받아들이라는 유교적 운명론이다. 아이들이 춥다고 하면 이불을 쌓아놓고 널뛰기를 시켰다. 나는 뜨거운 옥수수 차로 몸을 데웠다. 그 꼴을 보신 시어머니께서, 아끼고 아끼..
마트에 묶인 머슴이었다. 그의 이름은 카트, 정규직이다. 눈 감고도 매장을 훤히 꿰뚫을 만큼 도가 튼 베테랑 직원이지만 임금이 없다. 임금이 없으니 노조도 없다. 노조가 없으면 파업이나 태업도 없다. 고용주 입장에서 인간이 아닌 직원은 더할 나위 없는 환상적인 파트너다. 사각의 프레임과 동그란 바퀴. 카트는 네모와 동그라미의 공존으로 굴러간다. 발 없는 철재 프레임을 바퀴 4개가 이끈다. 프레임이 아무리 견고하고 훌륭해도 바퀴가 있어야 제구실을 한다. 바퀴도 마찬가지,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다. 동그라미가 없다면 네모는 무용지물이고 네모가 없다면 동그라미도 쓸모없다. 전체를 구성하는 개체들의 운명이 그러하듯 모든 관계는 유기적으로 돌아간다. 네가 없다면 나의 존재 이유가 불투명하듯이. 둥근 바퀴가 프레임..

은 실존인물 전봉준과 가공인물 신하늬를 등장시켜 동학혁명을 형상화하였다. 동학농민전쟁을 주제로 백제에서부터 조선시대, 그리고 이 시를 발표한 1967년까지 민중 역사를 다룬 전 3부 26장의 장편서사시다. 1부는 1, 2로, 2부는 제1장부터 26장까지, 3부는 後話, 로 구성 되었다. 1// 우리들의 어렸을 적/ 황토 벗은 고갯마을/ 할머니 등에 업혀/ 누님과 난, 곧잘/ 파랑새 노랠 배웠다.// 울타리마다 담쟁이넌출 익어가고/ 밭머리에 수수모감 보일 때면/ 어디서라 없이 새 보는 소리가 들린다.// 우이여! 훠어이!// 쇠방울소리 뿌리면서/ 순사의 자전거가 아득한 길을 사라지고/ 그럴 때면 우리들은 흙토방 아래/ 가슴 두근거리며/ 노래 배워주던 그 양품장수 할머닐 기다렸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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