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중에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기억 속의 풍경입니다. 그 중에서도 길이 있는 풍경은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끝이 보이지 않게, 막막하게 이어져 있는 길. 그 길을 따라 무작정 떠나고 싶게 하는 길이 있는 풍경. 미래이며 꿈이며 걷지 않으면 안 되는 길. 방황이며 귀로인 길. 현재 우리 땅은 사방팔방 거미줄처럼 가락가락 길이 얼크러져 있지만 ― 마치 현대인의 삶처럼 정신없게 ― 기억 속 그 길은 한적하고 외로운 길이었습니다. 대접 같은 야산과 논밭이 하늘과 평행으로 펼쳐진 평야에 강둑 따라 한없이 길게 이어진 신작로. 그 황토색 신작로에 햇빛이 내리면 부웅 떠 보이던 새 길. 마치 줄자를 풀어 주욱 그어놓은 듯하며 길 끝은 늘 하늘 속인지 대지 속인지 알 수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 길은 일상생활을 하느라..
학교에서 배운 것 / 유하 인생의 일할을/ 나는 학교에서 배웠지/ 아마 그랬을 거야/ 매 맞고 침묵하는 법과/ 시기와 질투를 키우는 법/ 그리고 타인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는 법과/ 경멸하는 자를/ 짐짓 존경하는 법/ 그 중에서 내가 살아가는 데/ 가장 도움을 준 것은/ 그런 많은 법들 앞에 내 상상력을/ 최대한 굴복시키는 법// 농담 / 유하 그대 내 농담에 까르르 웃다/ 그만 차를 엎질렀군요/ 미안해 하지 말아요/ 지나온 내 인생은 거의 농담에 가까웠지만/ 여태껏 아무것도 엎지르지 못한 인생이지만/ 이 순간, 그대 재스민 향기 같은 웃음에/ 내 마음 온통 그대쪽으로 엎질러졌으니까요/ 고백하건데 이건 진실이에요// 무력(武歷) 18년에서 20년 사이 -무림일기1 / 유하 경천동지할 무공으로 중원을 휩쓸..
누구에게나 인생여정에서는 크고 작은 목표가 있을 것이다. 마치 완행열차를 타고 먼 길을 떠나면 만나게 되는 여러 개의 역(驛)처럼. 물론 열차의 방향을 어느 쪽으로 잡느냐에 따라 머물게 되는 역의 성격이나 환경은 각기 다르겠지. 그러나 어느 방향으로 선택했던 간에 도중에 만나는 역이 마음에 들거나 제게 이익이 될 것 같다 하여, 아예 그 곳에 눌러 앉을 수는 없는 일이다. 아무리 머물고 싶어도 시간되면 다음 역을 향해 떠나야 하는 게 인생길이기 때문이다. 떠남은 시간의 흐름이요, 목적이란 스쳐 지나가는 삶에서의 작은 매듭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의 목표만을 내세워 끝을 보려 하는 행위가 과연 최선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는 무소속(無所屬)으로 평생 일곱 번을 국회의..
달은 추억의 반죽덩어리 / 송찬호 누가 저기다 밥을 쏟아 놓았을까 모락모락 밥집 위로 뜨는 희망처럼/ 늦은 저녁 밥상에 한 그릇씩 달을 띄우고 둘러앉을 때/ 달을 깨뜨리고 달 속에서 떠오르는 노오란 달/ 달은 바라만 보아도 부풀어오르는 추억의 반죽 덩어리/ 우리가 이 지상까지 흘러오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빛을 잃은 것이냐/ 먹고 버린 달 껍질이 조각조각 모여 달의 원형으로 회복되기까지/ 어기여차, 밤을 굴려가는 달빛처럼 빛나는 단단한 근육 덩어리/ 달은 꽁꽁 뭉친 주먹밥이다. 밥집 위에 뜬 희망처럼, 꺼지지 않는// 달빛은 무엇이든 구부려 만든다 / 송찬호 달빛은 무엇이든 구부려 만든다/ 꽃의 향기를 구부려 꿀을 만들고/ 잎을 구부려 지붕을 만들고/ 물을 구부려 물방울 보석을 만들고/ 머나먼 비단길을 구..
어둠이 채 가시기도 전에 길을 나섰다. 꼭 안개를 봐야 했기에 마음이 더욱 조급해졌다. 조급증 탓인지 주산지 들머리에서 잠시 길을 잃었다. 길은 여러 갈래였고 절 골로 오르는 갈림길에서 한 동안 시간을 지체 했다. 어두운데다 초행길이다 보니 길을 잃은 것이 당연지사겠지만 잠시 당황스러웠다. 살다보면 어디 길을 한두 번 잃어 보던가? 헤매다가 쉽게 길을 찾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맴돌기만 할 뿐 길 찾기가 영 어려워지는 때도 있는 법이다. 허나 가끔 있는 이런 지체들이 인생에 마디를 만들어 주고 그 마디들이 쌓여 삶의 축이 되는 것이 아닐까? 이리 생각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느긋해 졌다. 더운 커피 한잔을 돌려 마시다 보니 어느새 주산지에 닿았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주산지로 오르는 길은 이제 막 어우러지기..
별을 캐는 밤 / 심응문 오늘 같은 밤에는 호미 하나 들고서/ 저 하늘의 별밭으로 가/ 점점이 성근 별들을 케어/ 불 꺼진 그대의 창/ 밝혀주고 싶어라// 초저녁 나의 별을 가운데 놓고/ 은하수 많은 별로 안개 꽃다발 만들어/ 만들어/ 내 그대의 창에 기대어 놓으리라/ 창이 훤해지거든 그대 내가 온 줄 아시라/ 내가 온 줄 아시라// 홍도 / 심응문 1./ 이 계절 돌아오면 그 섬에 가고 싶다/ 중턱쯤 양지바른 동백 숲 그 언덕에/ 그대의 마음닮은 그 꽃들 보고 싶다/ 보고싶다 그 꽃들이 보고 싶다// 그대를 꼭 닮아서 붉게 타는 노을이여/ 사랑의 언어들로 편지를 띄우련다/ 우체국 흰 담장 넘어 숨죽이는 그대 숲에/ 받는 이 그대이길, 오직 당신, 당신이길/ 나 지금 마른 가슴 목이 타는 갈증으로/ 촉촉..
칼끝이 무디다. 거친 사포로 문지르고 고운 사포로 마름질하여 가지런히 옆에 놓는다. 마음처럼 되지 않는 작업에 나무판을 정리하다 칼을 매만지기만 반복한다. 서각을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슷한 각도의 빗음각이 제대로 될 리 없다. 거실에 걸어둘 작품을 만드는 중이다. 식구들이 자주 보는 곳에 걸어두고 풀어내기 힘든 일이 있을 때면 무너지지 않는 용기를 북돋우고 타성에 젖어 안주하는 마음이 생길 때 깨우침을 줄 만한 글귀를 고르느라 고심한 끝에 이만한 게 없다 싶은 글귀를 찾아냈다. 질경이, 우리나라 전 국토에 뿌리를 내려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식물의 대명사로 큰 울림을 주는 여러해살이풀이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가에 난다 하여 길경이 또는 차전자라고도 불린다. 봄 여름에 걸쳐 어린잎과 뿌리는..
시집 는 김억의 첫 시집이자 조선 근대문학 최초의 창작시집이다. 총 83편의 시를 9장으로 나누어 수록하였으며, 총 162쪽(18.7cm×12.7cm), 국한문 혼용. 서문 / 김억 해파리의 노래 같은 동무가 다 같이 생(生)의 환락에 도취되는 사월의 초순 때가 되면 뼈도 없는 고기덩이밖에 안되는 내 몸에도 즐거움은 와서 한(限) 끝도 없는 넓은 바다 위에 떠놀게 됩니다. 그러나 자유롭지 못한 나의 이 몸은 물결에 따라 바람결에 따라 하염없이 떴다 잠겼다 할 뿐입니다. 볶이는 가슴의, 내 맘의 설움과 기쁨을 같은 동무들과 함께 노래하려면 나면서부터 말도 모르고 ‘라임’도 없는 이 몸은 가엾게도 내 몸을 내가 비틀며 한갓 떴다 잠겼다 하며 볶일 따름입니다. 이것이 내 노래입니다. 그러기에 내 노래는 설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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