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껍데기는 가라 /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신동엽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 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
통일호 열차가 부산에 닿자 숱하게 흩어져 내리는 학생들 속에서 나는 검정색 셔츠에 단발머리 모습의 딸아이를 찾느라 눈이 바빴다. 그런데 어느새 내렸는지 ‘엄마’하고 뒤에서 어깨를 껴안는 음성이 바로 갈색 스웨터에 주름을 잔뜩 잡아 세운 폭넓은 스커트를 멋있게 차려입은 딸아이였다. “넌 무슨 옷을 그렇게 입었니?” 나의 핀잔에 “이거 멋있잖아요. 엄마” 하면서 한 바퀴 무용하듯 빙그르르 돌아 보였다. 다음 날 저녁, 모녀가 나란히 자리에 누워 책을 읽다 말고 문득 딸아이는 내게다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었다. 학교 영문학 시간에 배운 소설 가운데 ‘논리적인 어머니’란 제목에 나오는 여주인공이 꼭 엄마와 같더라고 한다. 너무나 까다롭고, 매사에 이치로만 따지려 드는 엄마가 슬프다는 것이었다. 오래간만에 만나는 ..

어머니의 손 / 이영도 갈쿠리 손을 잡고/ 가만이 눈감으면/ 꽃버선 색동옷/ 고이짓던 그 모습이/ 星霜도/ 예순을 거슬러/ 볼이 고운 새댁이여!// 바위 -어머님께 드리는 詩 / 이영도 여기 내 놓인대로 앉아/ 눈 감고 귀 막아도// 목숨의 아픈 證言/ 꽃가루로 쌓이는 四月// 萬里 밖/ 回歸의 길섶/ 저 歸燭道 피 뱉는 소리// 바위 / 이영도 나의 그리움은/ 오직 푸르고 깊은 것// 귀먹고 눈 먼 너는/ 있는 줄도 모르는가// 파도는/ 뜯고 깎아도/ 한번 놓인 그대로 …// 언약(言約) / 이영도 해거름 등성이에 서면/ 愛慕는 낙락히 나부끼고// 透明을 切한 水天을/ 한 점 밝혀 뜬 言約// 그 자락/ 감감한 山河여/ 귀뚜리 叡智를 간(磨)다.// 달무리 / 이영도 우러르면 내 어머님/ 눈물고이신 눈..
일전에 한 모임에서 있었던 일이다. 모인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정성을 모아 음식이 차려졌다. 떡과 과일 그리고 술 외에 된장국으로 차린 밥상이었다. 서른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음식은 남았다. 그 중에서도 된장국과 술이 너무 많이 남아서 연유를 물어보았다. 된장국은 60인분이라서 남았고 술은 먹는 이가 거의 없어서 남았다는 것이다. 술을 준비한 분은 평소 애주가였고 된장국을 준비한 분은 한 끼 더 먹을 것을 미리 계산하여 두 배로 준비해 왔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을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행사가 끝나고 며칠 뒤 들리는 몇 마디 말은 필자에게 커다란 화두가 되었다. 그날 술을 한 박스 준비해 온 사람과 60인분 된장국을 준비해 온 사람의 이야기인데 두 사람의 재산 차이는 백배에 가까웠다. 두 ..
사람에게도 맛이 있다. 여러 번 만나도 밍밍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단 한 번의 만남에도 톡 쏘는 맛이 나는 사람도 있고 또 만날수록 깊은 맛이 나는 묵은 지 같은 사람도 있다. 여러 가지 맛 중에서 나는 특별히 새콤달콤한 맛이 나는 사람을 좋아한다. 얼마 전, 토봉요의 전통 가마에 불을 지핀다는 소리를 듣고 달려갔다.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예술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로 화가, 도공, 염색공예가, 조각가 외에 소리꾼도 있었다. 사람들이 가마 앞으로 모여들었다. 주황색 하늘이 산을 덮자 그 아래 작은 연못은 기다렸다는 듯이 동그란 몸 안에 산을 품었다. 산은 금세 무채색으로 물들어 갔다. 색의 릴레이 경주를 벌이듯 아궁이는 황색 불빛을 받았다. 지네마디 같은 가마 굴 속으로 불꽃이 오르..
수필가 주인석의 실험수필 3 만일 골짜기가 없었다면 우리는 산을 무엇이라 불렀을 것 같소? 한 덩어리가 되어 팽팽하게 솟구친 땅을 두고도 우리는 산이라 불렀겠소? ‘산’이라는 낱말의 탄생은 ‘골’이 있었기 때문일지 모르오. 나는 골짜기의 고통이 아름다운 산을 만들었다 생각하오. 우리의 삶도 굴곡이 있을 때, 더 인간답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보오. 울산의 송정과 대송 그리고 평동은 산으로 둘러싸인 삼형제 마을이라 하오. 이 마을 산신령은 자부심이 대단했소. 커다란 산을 지킨다는 뿌듯함도 있었지만 산짐승들의 충성심이 더 큰 이유였소. 많은 짐승들은 앞을 다투어 산신령에게 좋은 선물을 했소. 그런데 우리 참새족속들은 신령님께 한 번도 선물을 하지 못했소. 나는 다리도 짧고 입도 작아 스스로 먹고 살..
수필가 주인석의 실험수필 2 나는 지금까지 한이 되는 일이 있다오. 밀고는 절대 아니라오. 나도 무척 속이 상해서 이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오. 배신이란 것이 무엇이오? 믿었던 사람에게 신의를 저버린다는 것 아니오?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기대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는 마음이오.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나를 배신한 사람으로 알고 있다오. 그래서 무엇이 배신인지 일의 자초지종을 들려주려 하오. 우리 마을에는 도독동굴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오. 입구에는 큰 바위 두 개가 솟을대문처럼 서 있고 한 사람 정도 빠져나갈 수 있다오. 그곳으로 들어가면 작은 동굴 입구가 보일 것이오. 동굴로 들어가려면 1m 정도 높이를 풀썩 뛰어내려야 하오. 입구는 좁으나 들어가면 5-6..
수필가 주인석의 실험수필 1 나는 바람기 많은 남선비요. 나는 대문을 지키는 신이고, 내 조강지처는 정짓간을 다스리는 ‘조왕각시’올시다. 나는 여자 욕심이 많아 첩실을 두었는데 그녀를 ‘측신각시’라 부른다오. 시샘이 많은 그녀는 자주 정짓간 자리를 탐냈으나 나는 그녀에게 뒷간 자리를 내주었소. 기가 센 두 여자가 날마다 다투니 내 머리가 복잡해졌소. 하는 수 없이 나는 뒷간을 정짓간과 가장 먼 곳으로 옮겼소. 멀리 떨어진 두 각시는 서로 헐뜯는 일이 작아지더니 마침내 서로 관심을 두지 않았소. 두 곳을 오가며 내가 정치를 잘한 덕인지 줄곧 평화가 이어졌소. 그런 까닭으로 나는 두 여자를 두고도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거나 후회하는 일은 거의 없어졌소. 두 각시 사이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어느 날부터 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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