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있었다. 그녀의 손동작은 한 치의 오차도 허용치 않는다. 그것은 숙련공의 자존심이자 저력이다. 5센티미터 간격으로 줄지어 서있는 구백여 개의 스핀들에 지관(紙管)이 꽂힌다. 뮬이 레일을 따라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뮬은 산업혁명시기에 영국의 크롬프턴이 발명한 방적기다. 수력방적기에서 생산되는 실은 튼튼했지만 거칠었고, 제니방적기에서 생산되는 실은 가늘었지만 쉽게 끊어졌다. 두 방적기의 장점만을 조합해서 만든 것이 뮬방적기다. 뮬의 조상을 물레라고 해야 할까. 전통물레는 물레질로 한 가닥의 실을 자아낸다. 현대의 뮬은 완전 자동화된 스핀들의 회전으로 구백여 가닥의 실을 뽑아낸다. 뮬은 바닥에 깔린 레일의 수만큼 바퀴를 달고 있다. 레일을 따라 앞걸음의 꼬여진 실감기와, 뒷걸음의 솜실 물고나오기와..
여행단원은 서른세 명이었다. 모두가 러시아 사람들이고 동양인은 아내와 나 두 사람뿐이었다. 러시아인들 틈에 끼어 북유럽 네 나라를 여행하겠다고 나선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애당초 우리는 러시아를 향하여 떠났었다. 셋째 아이가 모스크바에 파견되어 있어서 만나러 갔던 것이다. 그런데 러시아와 북유럽은 근접해 있으므로 우리나라에서 가는 것보다 경비가 삼분지 일 이상 저렴할 것이라는 셋째의 말이 우리를 유혹하여 내친김에 북유럽까지 둘러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9박 10일간의 여행, 버스와 크루즈 투어로만 이어지는 이번 여행은 러시아어를 한 마디도 모르는 벙어리요 귀머거리인 우리들에게 모험 이상의 것이었다. 그들의 눈에도 우리가 무모하게 보였는지, 헬싱키에서 처음으로 통성명을 한 헤밍웨이-외모가 헤밍웨이와 흡사..
독립문 공원을 벗어났을 즈음 낯익은 팝송이 들렸다. 부드럽고 감미로운 선율이 차량의 소음을 물리치며 울려퍼졌다. “Knowing you don’t need me~”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였다.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으로 번안되어 한 시절 어디서나 들려오던 곡이었다. 나는 이끌리듯 소리를 찾아 나섰다. 사거리에 있는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한 남자가 마이크를 잡고 있었다. 추억이 되어버린 가수의 노래를 자동차와 사람이 쉴 새 없이 지나는 도심 한가운데서 듣게 되다니. 괜한 설렘으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렸다. 남자는 호흡을 모으는지 상체를 앞으로 살짝 구부리고 있었다. 저녁 햇살이 남자의 어깨로, 보도블럭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파킨스병 20년차 약 미복용시 전신근육마비 기초생활대상자이나 생계비 중지 이유-사..
눈 속에 잡풀더미를 그려낸 화가가 있었다. 그는 거기에 얽혀 있는 다양한 선과 독특한 조형미에 반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를 표현해 봐’ 하고 속삭이는 풀의 유혹 앞에 주저앉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화가의 말에 야릇한 질투심을 느꼈다. 시골 어디에나 펼쳐져 있는 풀더미의 목소리를 찾아내는 그 심미안이 부러웠다. 글을 쓰는 일도 결국 그런 것이 아닐까. 무심코 지나가는 일상에서 혹은 사물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일이 글의 생명이라 하지 않는가. 화가의 풀더미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리저리 엉켜있는 그것들에게서는 시린 바람과 무표정한 흙의 군상, 부질없이 흩날리는 눈발이 보일 뿐 화가가 느꼈던 유혹의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잔치가 끝난 뒤의 어수선함이랄까. 을씨년스러움 같은 것이 느껴지기만 했다. 그들..
강정 시인 1971년 부산광역시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는 부산에서 나왔지만 이사를 자주 다녔다. 서울에서 중학교를 나오고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91년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1992년 《현대시세계》에 〈항구〉외 5편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침소밴드 리드보컬, THE ASK 멤버로 활동했다. 2015년 제4회 시로여는세상 작품상, 제16회 현대시작품상, 2017년 제3회 김현문학패를 수상했다. 시집으로 『처형극장』,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 『키스』, 『활』, 『귀신』, 『백치의 산수』, 『그리고 나는 눈먼 자가 되었다』, 『커다란 하양으로』 등이 있다. 아침의 시작 / 강정 어젯밤엔 집으로 돌아가는 나의 그림자가 죽었다/ 문지방 앞에서 흘러내린 어둠엔 꽃냄새가..
제4회 포항스틸에세이 대상 붉은 꽃무리가 해마다 늘어간다. 엄지손톱만 한 반달 모양의 녹 하나하나가 햇빛을 받아 선연한 핏빛을 반사한다. 흙 한줌 물기 한 방울 없는 곳에서 피는 꽃의 생명은 어디서 오는 걸까? 시골집 어두운 광에는 낡은 대나무 소쿠리가 오래전부터 놓여 있다. 그곳에 담긴 물건은 대부분 50년 전 아버지가 집을 지을 때부터 썼던 도구들이다. 육지로 나서면 자잘한 것들에 불과 하지만 섬에서 살려면 없어서는 안 되는 생활필수품이다. 소쿠리에 담긴 괭이, 호미, 부엌 칼, 낫, 쇠톱, 못 등은 쓸모없어지면 외면당한다. 그렇더라도 버리거나 버려질 수 없다. 시선을 끄는 것이 하나 있다. 길이는 한 뼘 정도이고, 손잡이는 동백나무이고 칼은 줄톱을 갈아 만들어졌다. 생전에 아버지는 그 칼을 허리춤에..
배가 밀려난다. 썰물과 하늬바람이 배를 물목으로 몰아붙이면 뱃사람들의 '어기여차' 힘을 쓰느라 소리가 높아간다.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이 대를 물려 노를 젓는다. 목소리도 물려받는다. 섬에서 노 젓는 일은 일상이다. 섬 아이들은 뭍에서 노는 것보다 바다에서 작은 배를 타고 노는 것을 더 좋아한다. 도시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노는 것처럼 그들은 덴마를 타고 논다. 덴마는 경상도 전라도 방언으로 본래는 전마선(傳馬船)이라 부른다. 배의 크기는 6미터 남짓, 육지로 이동하거나 해산물을 채취하기 위해 가까운 섬과 섬을 이동할 때 이용한다. 덴마를 움직이는 것은 서양식 주걱 노가 아니라 전통 노이다. 덴마는 무게가 꽤 나가는 편이라 보트에 사용하는 서양 노로는 배를 움직일 수 없다. 전통 노로 ..
내가 학교라는 곳을 가서 처음 배운 것은 ‘앞으로나란히’와 ‘어머니 어머니 우리 어머니’였다. 앞사람의 뒤통수를 지켜보며 두 손을 들고 내 위치를 맞추려 긴장하였다. 저만큼에서 줄이 좀 굽었다 해도 그것은 관심 밖이었다. 오로지 앞사람의 뒤통수가 잘잘못의 기준이 되었다. 모든 생각은 ‘나’에서 시작하지 않고, 앞에 있는 친구에서부터 출발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학습이란 것을 시작하면서, ‘우리’라는 말을 가장 먼저 익혔다. 나만의 생각과 고민을 해결하려는 학습이 아니고 매사는 공동체인 ‘우리’에서 출발하였다. 그런데 얼마의 세월이 흐른 후, 초등학교 일학년 교과서의 첫 쪽에는 ‘푸른 하늘’에서부터 시작한다. 손에 잡히지 않는 ‘푸르다’와 ‘하늘’을 교사는 어떻게 설명하였을까. 참으로 엄청난 변화다. 인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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