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는 은은함이 감돈다. 부드러운 조명 때문만은 아니다. 바닥과 벽면을 채운 질 좋은 나무 결이 한몫을 한다. 목재는 금속이나 플라스틱에 비해 질감이 좋다. 결코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주변과 잘 어울리는 조화로움을 지녔다. 요란한 색상으로 시선을 모으려하지 않는 겸손과 중후함까지 갖추었다. 사람이라도 그만한 품격을 지니기는 어려운 일이다. 연갈색의 목재가 주는 온화함에 잠겨본다. 현絃을 고르는 미세한 음이 흐르고, 이내 연주가 시작된다. 그곳에는 나무로서 가장 그럴듯한 위치에 오른 현악기들이 있다. 은발이 잘 어울리는 노老 연주자의 품에 안긴 더블베이스와 깔끔한 중년 단원과 포옹하는 첼로, 그들은 나무라는 재질의 악기가 아니라 연주자의 분신이다. 상팔자를 누리는 것은 바이올린이다. 날렵한 미모의 젊..
그랑께, 사램도 지가 가진 깜냥이 있고, 지 분수를 알아야 헌다는 거 아니겄소잉. 지 깜냥을 다 못 허고, 지 분수를 못 지키면 쎄를 차기 마련이지라우. 나가 무슨 말을 하고자퍼서 요러크름 사설이 질게 나왔냐 허믄, 인사동에 가보셨능게라우? 내는 영 몰똑잖여서 말이여. 아따, 워째서 그 뽁잡허고 째깐헌 질에다가 탁시고 자가용이고 지 맘대로 다니게 헌다요. 글안해도 와글와글 도깨비시장처럼 정신이 한나도 없는디. 주차장이 되야분 질바닥을 봉께 지게차로다띠메갔으먼 싶등만. 그것 쪼까 걸어간다고 혀서 다리몽댕이가 썽이 나는 것도 아니것고, 막혀불먼 싸게싸게 걸어감만 못허당께요. 맛난 괴기 묵고 체허대끼 당체 까깝혀서 원. 거시기 뭐시냐, 인사동 허믄 우리 나라 낯바닥 아니요. 코쟁이덜이 불티나게 찾는 곳인디 솔..
봄에 매화로 시작한 꽃차 만들기는 가을에 국화로 마무리된다. 올해는 극성맞을 정도로 꽃을 찾아다녔다. 매화, 진달래, 복숭아꽃, 민들레, 인동초, 수레국화, 도라지…. 가을이 되자 도진 허릿병 때문에 국화차 만들기는 그냥 넘어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도로변이나 들판, 산등성이에 얼비치는 노란 빛이 자꾸 눈에 채였다. 결국 곰이 아닌 호랑이를 택하고 말았다. 쑥과 마늘로는 견디지 못해 동굴을 뛰쳐나가 발굽을 차고 달리는 호랑이처럼 바퀴를 굴려 달려갔다. 마침 봐 둔 밤나무 숲이 있었다. 초입에서 몇 포기를 발견했는데 수풀 속으로 들어가자 노란 불꽃처럼 활활 타는 산국 군락. 이 정도를 말리려면 열두 개의 채반으로도 부족할 것 같았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춤을 추고 싶을 지경이었다. 드디어 꽃에 ..
출근하고 등교하는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후, 또 한 차례 아파트 현관이 분주해진다. 수영복이나 체육복이 들어 있는 가방을 메고, 혹은 서실書室로 향하고 무슨 강좌나 취미 교실에 참석하러 나가는 주부들의 발길에도 신선한 바람이 인다. 그녀도 활기를 되찾았다. 가끔 찻잔을 놓고 마주할 때면, 이제 제 앞가림하는 자식들이나 직장 일에 바쁜 남편에게나, 자기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 같다던 그녀였다. 중년을 의식하듯 자아 상실과 무기력에 빠져 있던 그녀가 도예를 만나게 된 건 행운처럼 여겨진다. 물을 만난 고기처럼 눈빛엔 생기가 넘친다. 허투루 보낸 시간을 되찾아서 쓰고 싶다고 한다. 가족들에게까지 드리워져 있던 우울의 그림자도 말끔히 걷혔다. 그녀가 만든 풍경風磬을 선물 받았을 때는, 거무튀튀한 색깔에 투..
경주의 어느 콘도에 여장을 풀기로 했다. 체크 인 시간이 두어 시간 남았기에 몇 군데 민속공예점을 기웃거리다가 반가운 물건을 만났다. 그것은 살이 아주 가늘고 고운 진소(眞梳)였다. 얼레빗(月梳)과는 달리 대나무 살이 실낱같이 아주 섬세한 빗이다. 빗살이 촘촘하고 가지런하며 사방 모서리가 꽉 여문 것이 어느 모로 보나 야무지기 한량이 없다. 그래서 참빗이라 하였을까. 양쪽 귀퉁이에 질긴 실이나 끈을 탱탱하게 매어서 빗살의 간격을 더욱 죄게 해서 쓰던 참빗. 하마터면 이름조차 잊을 뻔했던 추억의 귀물(貴物)이다. 그러나 이제는 긴요한 생활용품이 아니라 민속공예품이라는 고상한 차림새로 진열장 속에 들어 있다. 오랜만에 만난 소꿉동무가 귀부인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난 기분이다. 손가락 끝으로 가늘고 뾰족한 빗살..
해거름 하산 길은 늘 아쉬웠다. 여인들이 풍덩한 치마폭을 추스리듯 물결치던 산줄기가 그 끝자락을 끌어당기는 곳에는 으레 난장판이 벌어졌다. 넓다란 바위가 폭파당한 뒤 그 까만 살덩이가 산산이 부서지고, 등뼈가 까무러뜨린 채 뻘건 늑골이 흉물스럽다. 거기다 어느새 삐죽삐죽 꽂힌 앙상한 철근 사이로 벌떡 누워버린 나무들이 뿌연 뿌리를 드러내고 있다. 여기 호젓한 산모퉁이에 서면 숨은 듯 초가집 지붕 옆으로 몽기몽기 작은 굴뚝에서 연기를 만날 차례인데, 그리고 희미한 불빛 사이로 도란도란 말소리에 딸그락딸그락 숟갈 소리가 들릴 때인데 말이다. 이렇게 두리번두리번 한참 내려오다가 서쪽으로 남아 있는 서러운 노을빛에 걸음을 멈추었다. 건너편 개울가 높다란 감나무에 살짝 까치집이 걸려 있었다. 옛날 아주 옛날, 내..
나는 영화에 문외한이다. 또 나에게 영화를 볼 기회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 내게 이제껏 본 영화 중 가장 인상 깊은 영화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킹콩'이라고 말할 것이다. 사실 줄거리조차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인상 깊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은지 모른다. 킹콩은 내가 일부러 극장까지 찾아가서 본 몇 안 되는 영화 중 하나이다. 그 영화를 본 날짜와 장소까지 정확히 기억한다. 1978년 1월 12일, 난 내 인생에서 잊지 못할 경험을 하고 난 후, 시내의 한 극장에서 그 영화를 보았다. 그날은 모 대학에서 박사 과정 시험을 친 날이었다. 석사 졸업반이었지만 직업을 얻을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고, 나의 모교에는 박사 과정이 개설되기 전이라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것밖에 없었다. 응시자들은 ..
오랜만에 김치 세 통을 담그었다. 시대의 변화와 환경의 변화에 따라 김치양념은 다소 변하지만 우리 민족의 가장 뛰어난 전통음식이고 자랑이라는 점만은 변함이 없어 중국에 있을 때부터 나는 줄곧 이렇게 김치를 직접 담그어서 먹는다. 고향에 있을 때에는 김치소에 담백하게 마늘과 생강만 넣었는데 환경이 바뀌면서 김치소에 때로는 소고기를 갈아 넣기도 하고, 때로는 북한식으로 오징어를 다져서 넣기도 하였다. 한국에 와서 궁중요리를 배운 후부터는 또 다른 양념으로 등장시키기도 하지만. 그리고는 김치독에 넣어서 잘 보관하였다. 김치독에 보관해야만이 김치는 제맛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딱딱하고 힘이 잔뜩 들어가 있는 배추는 소금에 절여지고 여러 가지 양념과 잘 어울려야 부드럽고 아삭한 맛있는 김치가 된다. 소금물에 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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