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연명의 말마따나 술이 근심을 쓸어 내는 비라면 웃음은 그야말로 생활의 활력을 불어 넣어주는 묘약이다. 일노일로(一怒一老 ) 일소일소(一笑一少) 라는 말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웃음은 사람의 몸에 엔돌핀이 돌게 하고 짜증도 가시게 한다. 우스운 이야기 하나. 해방 직후 군정 시에 미국의 어느 고문관이 부산에서 경부선 열차를 타고 상경중이었다. 그런데 쳐다보는 사람마다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줌통 내밀듯 감투밥을 주는 게 아닌가. 영문 모른 고문관은 신기해 하며 통역관에게 무슨 뜻이냐고 묻는 것이었다. 난감해진 통역관은 기지를 발휘하여 환영의 표시라고 둘러대었다. 그런데 아뿔사! 서울에 도착한 그 고문관은 한 기념식장에 도착하자마자 모여있는 좌중에게 만면에 웃음을 띄며 다짜고짜 감투밥을 먹이는게 아닌가. ..
늙어 가는 사람만큼 인생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 인생의 단맛 쓴맛을 두루 겪어온 처지이니 만큼 그러려니 싶다. 어떤 고통도 지나고 나면 아름다운 추억으로 승화되듯이, 희노애락(喜怒哀樂)이란 인생의 강을 건너오면서 어찌 인생에 대하여 미운 정 고운 정이 없을 것인가. 그런데 과연 몇 살부터가 노인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나이일까. 그 나이도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은 아닐까. 아득한 옛날 같으면 나도 당당히 노인대접을 받을 나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노인이라고 뻐길 수가 없다. 노인 인구가 해가 갈수록 급격히 불어난 때문이다. 시내버스를 타더라도 경로석에 버티고 앉을 처지가 못된다. 나보다 더 연로한 진짜 노인들이 많은 탓이다. 경로당엔 얼씬거릴 수도 없다. 그 곳 역시 입장이 다르지 않다. 어린이들에겐 ..
어렸을 때 고향에는 멧돼지의 습격을 받아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 사람이 있었다. 젊어서부터 산짐승 잡기를 익혔다. 짐승들이 잘 다니는 길목을 짚어 산 구석구석에다 덫이나 올가미나 낚시를 설치하였다. 하루에 한 번씩 순회하면서 걸려 죽은 짐승들을 수거하였다. 족제비, 너구리, 오소리나 여우는 창자와 살코기와 뼈를 발라내어 고기는 먹고 모피를 말려 팔았다. 노루와 멧돼지는 고기를 팔았다. 마흔다섯에 일을 당하기까지 이십여 년 동안 셀 수도 없이 많은 짐승들을 그 사람이 죽였다. 그날도 길목을 살피러 산을 돌다가 멧돼지 한 마리가 올가미에 걸려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큰 송아지만 하였다. 그는 희색이 만면하여 혼자 소리를 질렀다. 올가미를 벗기니 아직도 몸이 식지 않았다. 그는 지게에다 실으려고 있는 힘을 ..
문을 여니 향긋한 냄새가 와락 몰려든다. 무엇일까. 두리번거리는 내게 텔레비전 위에 작은 바구니가 눈에 들어온다. 아마도 냄새는 거기서 나는 것 같다. 얼마 전 병원에 입원했던 처제에게 친구가 가져왔다던 세 개의 모과, 그 때 처제는 제일 잘 생긴 것으로 골라 나에게 주었었다. 헌데 언젠가 보니 바쁜 일상의 뒷전에서 보아주는 이 없이 저만치 밀려나 메마른 쪼그랑박이가 되어 있었다. 이제는 버릴 때가 되었다고 생각되던 물건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빈집을 지키며 방안 가득 향기를 채워 놓고 있었으니…….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 가만히 모과를 들어본다. 노오랗던 처음의 색깔이 이젠 거무스름해졌고, 그나마 쪼그라져 메마른 모습에는 아무런 향기도 남아 있지 않을 것만 같다. 그런 모과를 처연한 모습으로 내려다보..
그녀는 내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내가 나타나기만 하면 어디 있다가 오는지 알 순 없어도 안개처럼 와서는 내 주위를 어슬렁거린다. 그녀의 발걸음은 조신하다. 몸매도 단아하고 깔끔하다. 사는 곳이 어둡고 조잡한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언제나 단정하다.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숨어 있다가, 온다는 기별 없이 슬며시 다가오곤 한다. 그녀는 따스한 곳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햇살이 싱그럽고 하늘이 높아지고 빨강 잠자리가 마당을 떼지어 빙빙 돌 때쯤, 그녀는 가을이 지나고 곧 겨울이 닥치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햇볕 가득한 방을 찾곤 한다. 작년도 그러하고 올해도 그러했다. 해산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런지도 모른다. 혈육을 잃고 나서 더욱 그러한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따뜻한 곳을 찾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천성적으로 그..
서랍을 정리하다 말고 방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차곡차곡 포개진 수첩들이 눈에 들어와서다. 어느 해는 하늘색으로, 어느 해는 갈색으로 압축된 지난날들이 한 뼘이 넘는다. 맨 위에 있는 수첩을 펼쳐본다. 수첩 곳곳에는 여행의 흔적, 기념일의 분위기, 우울한 날의 표정까지 삶의 부스러기들이 마른 잎사귀처럼 납작하게 눌러져 있다. 단정한 글씨는 고요하게 맑은 마음이었을 테고, 휘갈긴 글씨는 찌뿌둥하게 흐린 마음이었을 테다. 뒷장으로 넘어갈수록 수첩은 여백이 많아진다. 새해에 가졌던 야무진 마음이 헐거워진 탓이리라. 몇 장 더 넘기자 눈에 익은 이름과 연락처가 길게 나열돼 있다. 일전에 구호활동가인 한비야 씨의 글을 읽으며 몹시 공감한 적이 있다. 한 해의 마지막을 묵은 짐 정리와 마음 정리로 마무리한다는 내..
죽은 직유 / 안도현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에게 직유가 뭐냐고 물으면 대답이 한결같다. ‘처럼, 같이, 듯이’ 같은 말이 붙으면 무조건 직유라는 것. 국어시간에 시를 공부할 때 유난히 많이 들어서 그렇다. 원래 수사법은 어떤 대상을 강조하거나 참신한 표현을 얻기 위해 만들어졌다. 사실을 왜곡하거나 표현 대상의 겉치레를 위한 장식용으로 수시법이 필요한 건 아니다. 아무것이나 몸에 걸친다고 다 옷이 아닌 것처럼. 직유는 원관념과 비유하고자 하는 보조관념이 비숫한 성질을 가지고 있을 때 주로 발생한다. ‘세월이 화살처럼 빠르다.’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을 한탄할 때 흔히 쓰던 말이다. 겉으로 보면 직유가 맞다 형식적으로는 직유의 체계를 갖췄지만 나는 이런 직유를 ‘죽은 직유’라고 부른다. 이미 어디에선가 많이 들었..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 김영랑, 중 모란은 봄을 보내며 피는 꽃이다. 늦은 오월에 피어 봄의 막바지를 장식한다. 꽃은 계절을 상징하고, 그 꽃이 있어 계절은 한층 계절답다. 모란이 피우는 자홍색 꽃엔 처연함마저 묻어난다. 무어 그리 안타까운 사연이 있는지 붉고 붉다. 진달래도 지고 목련과 수선화도 피었다 진 때에 짙게 피어서는, 봄의 끄트머리를 아로새긴다. 공단 결처럼 보드라운 모란 꽃잎은 얼핏 보아 종이꽃 같다. 생화인지 조화인지 잠시 헷갈린다. 만져보면 꽃잎의 감촉은 아기 살결처럼 보들보들하니 생명을 머금었다. 조용한 강촌이나 한적한 시골집 흙 담 아래 혹은 사찰 주변에서 그곳 토박이처럼 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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