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게 드리운 파릇한 햇살이 까닭 없이 닭의 부리에 쪼이고 노곤한 바람, 매화나무 가지에 앉아 자울거리는 뜨락, 며칠 전부터 딸싹거렸던 텃밭 몇 두럭을 갈아엎는다. 새참 나절, 삽질에 묻어 나오는 맨살의 봄을 헤집어 보며 두어 사발 들이켠 막걸리가 골마리를 내리게 하였는데. 사알짝, 매화나무 방패 삼은 뜨뜻한 방뇨에 놀란 꽃잎이 내 머리 흔드는 것처럼 진저리 치며 떨어진다. 서둘러 거두는 오줌 줄기를 빼꼼히 바라보는 여린 풀잎의 항변을 모른 채 고개를 돌린다. 때마침 나와 눈이 마주친 오식이*. 세숫대야 속에 앉아 못 볼 것이라도 본 듯 어색한 자맥질을 연방 허공에 해 대는 품새가 날기라도 할 것 같다. 그렇게 본능처럼 봄이 여무는 마당 풍경 너머로 확성기 소리가 들려온다. 잠시 아날로그 사진이라도..
잠드는 게 쉽지 않다. 아침 일찍 선산으로 출발하려면 잠을 좀 자두어야 하는데 갈수록 정신이 또렷해진다. 방금 읽다 덮어놓은 책 속에서 글자들이 나와 천정에서 오락가락한다. 1896년에 태어난 김명순에서 1915년생인 임옥인 까지, 11人의 작가 단편 모음인 『페미니즘 정전 읽기 Ⅰ』 , 『Ⅱ』. 작가들의 교육수준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돌아가신 내 어머니보다 많게는 23년 적게는 4년 전에 태어난 그들은 그 시대의 지식인이었지만 아쉽게도 작품의 내용은 시대에 갇혀있었다. 페미니즘이란 용어 자체가 11人의 작가들에 대한 지칭이 아니었나 싶다. 인간적인 삶, 특히 여성에게 인간적인 삶이란 과연 무엇일까를 새삼 생각해본다. 강경애의 「지하촌」이 마음을 뒤흔들었다. 살아내려는 몸부림을 처참하게 그려냈다. 내가..
그해 겨울은 몹시도 추웠다. 사무실의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00동00호 집이다. 홈오토 화면이 안 나온다고 한다. 나는 그 아파트 설비기사였지만 구내통신 업무도 함께 맡아보았다. 간단한 공구와 홈오토 화면 부품을 챙겨 그 집을 방문했다. 집밖에서 벨을 눌렀다. 거실 벽면에 붙은 홈오토를 살펴보니 화면이 시커멓다. 기기를 탈착해 분해하고 화면을 바꾸어 벽에다 부착했다. 가느다란 실선을 연결할 때다. 내 손이 선을 제자리에 잇고 있는데, 머릿속에서는 다른 생각이 가득 차올랐다. 넓은 실내는 아름답게 꾸며진 인테리어로 화려했다. 집안의 훈기는 바깥 기온과는 너무나 차이가 났다. 이런 따뜻한 집에 사는 사람이 부러웠다. 추운 겨울에도 기름 값이 아까워 보일러 사용을 하지 않는 내 처지가 떠올랐다. 그 순간..
가령 몽테뉴의 수상록은 몇 번이나 들었다 놨다 하고서도 아직 읽는 중이다. 삽화나 공백 없이 천삼백 페이지가 넘는 책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살아있는 동안 내내 고민한 인류의 스승 몽테뉴가 체험에 몰두한 인생의 솔직한 고민을 담고 있는 인간 연구서라는데, 이 책만 펴면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한낮에 책을 읽으려니 진도가 나가지 않는 것이다. 벨 소리가 잠을 깨웠다. 주문한 책이 왔다. 세 권의 책을 읽기 쉬운 순서로 놓았다. 삽화가 있는 것을 맨 위, 공백을 둔 것은 그다음. 문자로만 된 두꺼운 책은 맨 아래 놓았다. 문자로만 된 책을 읽으려면 상당한 집중력과 시간이 필요하므로 따로 날을 잡아야 한다. 요즈음에는 삽화나 공백을 둔 책들이 많다. 그런 책을 만들고 선택한..
붓끝에 사랑과 정이 흐른다. 바람을 탄 붓끝이 산허리를 휘감아 돌며 먹구름에서 비를 부른다. 지상으로 내리는 빗물이 졸졸 끊임없다. 계곡을 흐르는 생명의 물줄기가 강물을 타고 출렁이며 바다에 이른다. 물줄기가 지나는 곳마다 생명체의 들숨날숨 소리가 바람소리와 화음을 이루고 있다. 거센 파도에 물보라 안개가 하늘을 날아 뭉게구름을 만든다. 산자락으로 내려앉는 동안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시다. 자연의 순환이요. 생명의 윤회다. 그 시작과 끝은 어디인가. 책상 앞 벽에 걸어놓은 액자 속 작품 ‘산(山)과 강(江)과 바다(海)’가 꿈틀대고 있다. 선배가 준 선물인데, 위에서 아래로 山은 전서체로 江은 행서체로 海는 초서체로 당신 자신이 쓴 한자 서예창작품이다. 화려하지 않아도 눈길을 끈다. 소박한 한..
새벽의 여신 에오스가 날개를 펼치는 어슴새벽,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받지 않으 면 도저히 찾아갈 수 없을 어둑한 길을 구불구불 돌아 향일암 아랫동네에 도착했다. 어둠을 밟으며 향일암을 향해 계단을 올랐다. 이곳을 몇 번 왔다 간 K 수필가의 안내에 따랐다. 먼동이 터오는데 조금이라도 빨리 도착하려면 계단으로 올라가야 한다기에 에둘러 가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통증이 무릎을 괴롭힌다. 땀은 등줄기로 흘러내려 허리춤에 쌓이고, 숨이 턱을 차고 올라도 계단 끝은 보이지 않았다. 어둠이 그 많은 계단을 감춰두었기에 겁도 없이 그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제 와서 후회해 본들 돌이킬 수 없는 길, 내가 선택한 길이기에 힘들어도 그 길로 가야 했다. 원효대사가 수도하던 중 관세음보살을 만났다는 곳, 원통보전에서 스..
분명 만장輓章이다. 큰집 높다란 담 안쪽으로 불긋불긋한 천이 나부낀다. 담장 안쪽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오겠다는 기별 없이 찾아온 고향 마을에서 큰집 담장을 올려다보고 서 있다. 출가외인이라고 그랬는지, 살기에 급급할 거라 그랬는지. 집에서는 내게 할아버지의 부음을 전하지 않았다. 어느 날 불쑥 찾은 고향에서 할아버지가 만장으로 나를 반겼다. 작은어머니가 그랬다. “할아버지가 너를 불렀는 갑다.”라고. 할아버지 생신일은 내 생일이기도 하다. 아궁이 불에 노릇하게 구운 도톰하게 살진 조기가 밥상에 오르는 이날, 할아버지와 겸상하는 나는 친척 앞에서 당당했다. 할아버지 생신 상 맞은편에 내 밥과 국을 올리면 내 생일상도 되었다. 나와 할아버지만 독상을 받고 다른 친척은 큰 상에 빙 둘러앉았다...
밥솥과 요강을 보자기에 싸서 들었다. 미리 잡아 놓은 이삿날에 세간붙이를 대표한 두 물건을 옮기는 일이다. 해묵은 이 집에서 이사할 날이 올 거라는 희망을 애초에 품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이 기연미연하고 믿기지 않는다. 스무 해 전 이 집으로 이사 왔을 때 다들 막다른 집이라며 풍수지리를 들먹였다. 그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사는 동안 우여곡절이 많았다.비가 오면 주방 천장에서는 비가 샜고, 어느 폭우 때는 차오른 빗물이 금 간 벽으로 새어들어 자다가 혼비백산한 적도 있다. 재개발지역의 묵은 집이라 손댈 필요성이 없는 집은 늘 눅눅했다. 좁은 공간에서 다 큰 어른들과 부대끼니 애들은 애들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받는 스트레스가 컸다. 더구나 아홉 형제의 맏이로 집안 대소사를 치를 때는 불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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