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 왼쪽 벽 높이 못 하나가 튀어나와 있다. 그 끝에 집 짓는 공사가 한창이다. 창문으로 들락거리며 자재를 나르고 있는 것은 허리가 잘록한 말벌들이다. 물어 온 것들을 이어서 작은 육각형을 하나씩 늘이고 있다. 벌의 날갯짓 소리가 공사장의 레미콘 돌아가는 소리 같다. 처음 발견했을 때는 새끼손가락 크기였는데 지금은 다섯 손가락을 활짝 벌려서 부챗살을 만든 모양만큼 지어 놓았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작은 베레모 꼭지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들어 달아 놓은 형상이다. 평소에는 발뒤꿈치를 들고 고개를 내밀어 안부를 물었는데, 잠깐 쉰다며 바람이 잘 들어오는 곳에 머리를 뉘었더니 벌집 밑바닥이 똑바로 보인다. 아하! 첫눈에 들어오는 느낌이 너무 강하다. 이제까지는 옆 모양만 보고 육각형이구나 짐작은 했는데 정확하..
현관을 닫으면 모든 필요한 것이 집안에 다 들어있는 요즘과는 달리 그때는 모든 것이 건물 밖으로 나와 있는 생활 방식이었다. 갑자기 내리는 비는 언제나 사람을 놀라게 했다. 한창 바쁜 농사철에는 부지깽이도 일을 한다고 했는데 마당에 널어놓은 것들이 많을 때, 소나기가 내리면 집안에 있는 사람은 물론이고 밖에 일나갔던 식구들도 뛰어 들어와서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열어놓은 장독 뚜껑을 덮고, 빨래를 걷고, 땔감으로 쓰려고 늘어놓은 젖은 생나무를 한 아름씩 안아서 부엌에 들이고, 마당에 쌓아놓은 것들에는 비닐을 씌웠다. 어느 때는 내리는 비를 맞으며 사방으로 뛰어다니다 보면 문득 비가 그쳐버려 들여놓은 것들을 다시 마당에 내다 놓아야 될지 어쩔지 난감하기도 했다. 소풍날에 비가 올까 걱정하듯이 중요한 행사를 ..
남편이 오늘도 병원에 가는 날이다. 일주일에 세 번씩의 병원 행이 그에게는 일상이 되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당연히 해야될 일을, 하기 싫어도 억지로 지켜내더니 10년의 세월동안에 버릇처럼 되어버렸다. 아직 힘겹게 진행 중인 일에 대해서 무어라고 말을 하는 것은 고통이지만 투병에 관한 이야기를 한 편쯤은 남겨 두어야될 것 같아서 글을 시작한다. 1993년 2월말 어느 날이었다. 저녁 준비로 바쁜 시간에 전화를 받았다. 남편과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선생님이 지나가는 말처럼 "중앙병원 응급실로 가보세요. 이 선생님이 거기 계세요."라고 했다. 얼마 전부터 음식물을 소화시킬 수 없어 먹지도 못하고, 잠도 이루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숨이 차서 걷기도 힘들어했기에 병원에 가보자고 권하다가 완강히 거절하여 하..

일 년 만에 동창회에 갔다 온 친구가 네 사람에 관한 소식을 전해 주었다. 사람이 다르다고 일어난 일이 네 가지가 아니라 한 가지로 통일된다. 네 사람의 일이 모두 죽음에 관한 일이기 때문이다. 남자 동창 두 명이 병으로 떠났고, 두 여자 동창의 남편이 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우울한 친구의 음성이 아니라도 한 해 동안에 그런 일을 당해 모임의 분위기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통계적으로 보면 이제는 갑자기 떠나기 쉬운 나이대에 이르렀다. 하늘이 준 연한을 사람이 어찌 짐작하리요만 갑자기 일을 당한 사람들은 억울한 죽음을 쉽게 순복하기 어렵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30년이 넘어서야 동기들이 만났다. 50대의 중늙은이가 되어서 어린 날을 추억하며 감동하는 일을 시작한 지 몇 해가 되었다. 총동창회의 ..
나는 요즘 '사로잡힌다는 것' 에 대해 종종 생각해 본다. 아니, 종종 생각해 보는 정도가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그리움과 향수를 가지고 생각하고 느끼고 연구하고 상상한다. 생각하고 연구한다고 되는 일이 아님을 잘 알지만 나는 그래도 계속 연구를 해 본다. 굳이 말하자면 '사로잡힘에 관해 생각하는 것' 에 사로잡혀 있다고나 할까. 나는 예전에는 원래 무엇에 '빠지기를' 잘하는 성격이었다. 뭔가에 몰두하기 시작하면 옆도 못 돌아보고 그것에만 열중하다가 나중에 부모님에게 "더 이상은 두고 볼 수 없으니 적당한 조치를 취해야겠다." 는 경고(?)를 받고서야 '아, 내가 또 그랬구나' 하고 깨닫곤 했다. 그래서 자라면서 부모님께 가장 많이 들어온 이야기도 아마 "균형 감각을 가져라" 는 말이 아니었나 싶다. 중,..

추운 날이었다. 아끼던 제자가 얼마 전 포장마차를 시작했다고 해서 찾아갔다. 바람 부는 빈터에 붉은 천막을 치고 모서리마다 꼬마전구를 장식해 놓은 포장마차가 그의 가게였다. 출입문 앞에는 단정한 글씨로 메뉴를 적은 종이가 선전 문구처럼 천막에 붙여져 있었다. 그 글씨체가 낯익은 제자의 글씨였다. 얼마 얼마 얼마…. 그 외에 몇 가지 음식이 행인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 경험도 없는 사람들이 저렇듯 여러 가지 음식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안주가 시원치 않으면 사람들이 안 올 텐데 우선 그 걱정이 앞섰다. 밤이면 골목길에서 자주 눈에 띄는 포장마차. 남이 하는 것은 밤거리의 낭만적인 풍경으로 볼 수 있었는데. 막상 사랑하는 제자가 하게 되니 그것은 낭만도 무엇도 아니고 단지 치열한 생존의..
뒤늦은 나이에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어떻게 글쓰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종종 듣게 된다. 무심히 지내다가 그런 말을 들을 때, 나는 항상 성장기에 내 곁에 계셨던 두 분의 스승을 생각하게 된다. 나에게 최초로 글쓰는 일에 즐거움을 갖게 한 분은 초등학교 시절 3년간 계속해서 담임을 했던 B 선생님이시다. 그분은 음악 미술 문학 등 예능 분야에 조예가 깊은 분이었다. 특히 글쓰기 지도에 열심이어서 우리 학급은 글 잘 쓰는 반으로 유명하였고 그 선생님의 적극적인 지도로 재능이 계발되어 훗날 문필가가 된 친구도 있다. 숙제로 글을 써 가면 세심하게 살펴 주고 아낌없는 칭찬을 해주었기 때문에 글쓰기에 재미를 붙이게 되고 자연스럽게 실력이 향상되는 것이었다. 그 무렵 내..
녹즙기가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스승의 날 선물로 녹즙기 한 개를 받았다. 대중 앞에 내놓고 쓰면 더 유용할 것 같아서 기숙사에 공용으로 내놓았었다. 다음날이었다. 도우미 할머니가 220볼트 코드에 맞추지 않고 150볼트 코드에 꽂아 녹즙을 짜다 녹즙기의 모터가 타버렸다. 코드 사용을 확인시켜주지 못한 잘못이 얼마나 후회되던지 고장 난 모터를 애완견 쓰다듬듯이 며칠 동안이나 어루만지다가 새로 사는 가격을 거의 다 주고 모터를 수선한 일이 있었다. 그 뒤부터 나는 전열기를 쓸 때는 코드가 맞는지를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교당의 감원할머니는 코드가 맞지 않은 다리미를 220볼트로 전압을 높여 사용하신다. 수년간 손에 익은 다리미인지라 트랜스를 사용하면서 할머니는 그 다리미를 쓰신다.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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