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복영 시인 1962년 전북 군산출생. 방송대 국문학과 졸업. 1997년 《월간문학》 시 등단. 2014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조. 2015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천강문학상 시조대상. 성호문학상 등, 시집 『낙타와 밥그릇』, 『햇살의 등뼈는 휘어지지 않는다』, 『거짓말처럼』, 『눈물의 멀미』와 시조집 『바깥의 마중』. 오늘의 시조회의와 전북작가회 회원 갈매새, 번지점프를 하다 / 박복영 아찔한 둥지난간에 올라 선 아직 어린 갈매새는 주저하지 않았다./ 굉음처럼 절벽에 부딪쳐 일어서는 파도의 울부짖음을/ 두어 번의 날갯짓으로 페이지를 넘기고/ 어미가 날아간 허공을 응시하며 뛰어내린 순간,/ 쏴아, 날갯짓보다 더 빠른 속도로 하강하던 몸이 떠올랐다.// 한 번도 바람의 땅을 걸어본 적 없으므로 ..
숲이 사람을 부른다. 숲속을 걸으면서 나무를 보고 자신을 반추한다. 아늑한 숲에서 지친 삶을 위로받으며 회복하고픈 본능이 살아나 숲을 찾아간다. 도시에 사는 우리는 숲에서 힘을 얻어 귀환하리라는 희망을 품고 산다. 쪽빛 바다에 눈이 시리다. 항구에 정박한 배를 탄다. 배는 사람을 싣고 섬에 부렸다가 숲길을 산책하고 돌아 나올 때까지 기다려 다시 육지로 간다. 궁농항에서 뱃길 따라 이십여 분 만에 도착한 섬은 과거 대통령의 별장이 있던 거제 저도猪島다. 지난여름 47년 만에 섬을 개방했다. 아직은 예약하지 않으면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는 특별한 섬이다. 시멘트로 정비된 길이 끝나면 이내 정갈한 녹색 숲이 열린다. 숲길은 혼자 걸어도 좋고 여럿이 걸어도 좋다.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나무계단 ..
강물이 맑은 하늘을 닮았다. 제 길 따라 흐르는 강물은 바람 소리처럼 나지막하다. 강 옆 흙은 봄날 계절답게 푹신하고 강 수면은 바람 장단을 풀어내어 흩어졌다 모이기를 되풀이한다. 은빛 강물은 오래 흘렀을 터인데 지치지도 않는가 보다. 대동면 조눌리로 가는 버스를 탔던 날은 오월 중순이었다. 팔 남매의 막내로 병약하게 태어난 열일곱의 여고생이 어머니 손을 잡고 한의원을 찾아가던 길이었다. 버스가 강을 건너서 비포장도로를 달리다 멈추었을 때 모래 먼지가 부옇게 일어 온몸을 하얗게 뒤덮었다. 처음 눈에 들어온 건 수양버들이 초록 머리를 길게 풀어 내리고 있었고 제법 깊은 수로 건너편엔 마을이 보였다. 조눌리鳥訥里는 낙동강 서쪽 모래톱에 자리한 마을이다. 모래밭에 철새들이 날아와 울음소리가 마치 더듬는 것 같..
번역문과 원문 강변 물새들의 자취는 사라지고 천상의 옥가루가 선장(仙掌)에 날린다 공중에 어지럽게 흩뿌리다 별안간 바람 따라 날리더니 평지에 가득 쌓여 어느새 한 길 높이가 되었네 몇 말이나 되는 술이 집집마다 가득하고 온갖 데에는 눈꽃이 촌죽(村竹)을 누르고 있구나 옷 전당 잡히고 마신 술의 취흥이 온천지에 횡행하니 백년 인간사가 한 순간이로다 江邊鷗鷺絶影響 강변구로절영향 天上玉屑霏仙掌 천상옥설비선장 空中散亂乍隨風 공중산란사수풍 平地彌漫忽盈丈 평지미만홀영장 十千斗酒盈比屋 십천두주영비옥 滿目瓊花壓村竹 만목경화압촌죽 典衣醉興橫八荒 전의취흥횡팔황 百年人事一瞬息 백년인사일순식 - 성임(成任, 1421~1484),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3권, 「한성부 십영 양화답설(漢城府 十詠 楊花踏雪)」 해 ..
“카톡, 카톡” 모임방이 난리다. 나른한 오후에 늘어난 의식을 한방에 깨우는 사진이 떴다. 거기에 퀴즈가 등장한다. 얼마 전 등단하신 L선생님께서 청춘 마음을 가진 글벗에게 꽃불을 당기셨다. 활발한 분들이 많으니 어디 그냥 넘어가겠는 가. 당연히 시작이 좋다. “이 꽃 이름은 무엇일까요? 정확하게 맞추시는 분께 커피 대접하겠습니다.” “어데서 핀 꽃인가요?” ““벚꽃” “돌복숭” “아닙니다. 용두산 공원에 핀 꽃입니다.” “왕벚” “복사꼬ㄷ” “수양버들” “근접했습니다.” “버드나무” “처진버곳ㅋ” “개벋” “ᄒᄒ 쳐진개벋” 살짝 사진을 확대해 보니 과연 꽃나무가 우아하다. 연분홍 꽃이 만개했는데 겹꽃인가, 나무 둥치를 보니 예사롭지 않다. 언뜻 보면 왕벚꽃 같고 어찌 보면 복사꽃으로 보이는 특이한 고목..
지하철 막차를 타고 집으로 향한다. 열두 시가 넘었는데 거리는 훤하다. 고층 원룸이 즐비한 골목길에 불 켜진 방이 절반 넘는다. 젊은이가 많으니 늦게 자는가 보다. 멀리 보이는 아들 방에도 불이 켜져 있다. 아마 새벽 2시는 넘어야 불이 꺼질 것이다. 아들은 고민이 많다. 취업준비생으로 입사원서를 접수하고, 필기시험을 치고, 면접 1차를 거쳐 2차를 통과해야 최종합격으로 출근을 할 텐데 그 과정을 끝내지 못했다. 대학 졸업 전부터 취업하기 힘들면 공부를 더 해 보라고 권유했지만, 취업하는 것이 좋다며 고단한 길을 선택했다. 엄마 관점에서 아들에 대한 불만은 없다. 세대 차이를 느끼지 않을 만큼 사리 분별을 갖추어 대화가 잘 되고 젊은이의 생활방식을 알려주는 꽤 괜찮은 남자에 속한다. 특히 깔끔하게 자기 ..
진혜진 시인 1962년 경남 함안 출생. 경희사이버대 미디어문예창작학과 졸업. 2016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 2016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당선. 2016년 계간 《시산맥》 등단. 시집으로 『포도에서 만납시다』(상상인, 2021)가 있음. 2021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혜. 제11회 시산맥작품상 수상. 현재 도서출판 상상인 대표. 얼룩무늬 두루마리 / 진혜진 너는 나로 나는 너로 감겼던 얼굴이 풀립니다 겹은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풀려야 할 것이 풀리지 않습니다 예전의 당신이 아니군요 풀린 것들에서 배웅의 냄새가 납니다 나는 얼굴을 감싸고 화장실을 다녀갑니다// 내려야 할 물도 우주라 욕조에 몸을 띄웁니다 세면대의 관점에서 얼굴은 흐르는군요 얼룩의 심장이 부풀어 오릅니다 비누..
몇 달째 답보상태다. 아무리 단전에 힘을 줘도 소리가 되지 않는다. 개미 쳇바퀴 돌 듯 같은 장단을 반복하다 보니 스승도 학생도 지쳐간다. 몇 발짝 들어가니 한 소절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돌아서는 날이 늘어난다. 벽에 부딪힐 때마다 입구는 있어도 출구는 없다는 어느 소리꾼의 말을 실감한다. 광대는 직업적인 예능인이다.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늪처럼 빠져든다. 우연히 발을 들였다가 평생 굴레를 벗지 못하기도 한다. 꿈에 부풀어 시작하지만, 예인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중도 하차하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가 부추기는 말에 고무되어 어설프게 들어섰다가는 의식주도 해결하지 못하고 가족들까지 힘들게 한다. 끼도 재능도 없으면서 화려한 무대에 심취되어 멀고도 험한 이 길을 선택하면 진정한 광대가 되지 못한다. 간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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