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사귀가 크고 화려한 나무들이 겨울 몇 달 동안 옷을 벗고 서 있는 모습은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이즈음 서울 시내에서 보기 힘든 광경이 되었지만, 어쩌다 덕수궁이나 비원에 들를 때 알맞게 마른 몸을 그대로 드러낸 채 편안하게 서 있는 나무들을 보면 생략할 것을 다 생략한 어떤 엄격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준다. 그 엄격함에 끌려 박수근 같은 화가는 여름 나무도 겨울 나무처럼 그렸을 것이다. 활엽수 가운데서도 느티와 버들의 누드는 마음을 끈다. 빗자루처럼 멋없이 박혀 있는 겨울 포플러나 집념투성이의 가지를 사방으로 내밀고 있는 벚나무의 나체는 우리가 쉽게 친할 수 있는 분위기를 주지 않는다. 가로수이기 때문이겠지만 여기저기 골절상을 입은 플라타너스의 맨몸도 마찬가지다. 느티는 의젓하고 깊다. 따로..
내가 어릴 적, 우리 집은 중국음식점을 운영했다. 가게에 딸린 작은 쪽방에서 네 식구가 생활했다. 가정집과 가게의 구분이 따로 없었으므로 나는 자주 홀에 나와서 놀았다. 7세 때 일이다. 가게 영업이 끝나기 전, 나는 손님이 없는 홀에서 물총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상상의 공간은 무진장 넓었다. 나는 총잡이가 되어, 보이지 않는 적들에게 총을 쏘아댔다. 그러나 블록버스터 규모인 내 상상을 감당하기엔 우리 가게 홀은 너무 좁았다. 나는 창문을 열고 허공을 향해 물총을 쏘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를 업은 아주머니가 길을 지나갔다. 놀이에 취한 탓인지 나는 사람에게 물총을 쏘고 싶어졌고 정말 쏘았다. 그것이 내가 사람을 향해 총을 쏜 최초의 사건이었다. 그런데도 내 총알(?)은 정확하게 그녀에게 명중했고 ..
어린 시절 우리 집은 단칸방이었다. 나에게 독립된 공간이 생길 때는, 가족들이 각자 다른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 그 순간뿐이었다. 나는 잠들기 전 시간을 좋아했다. 남들과 어울리는 것은 나에게 부담을 주곤 했다. 그런 내가 오롯이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잠들기 직전뿐이었다. 나는 나만의 공간인 이불에 들어가 상상의 세계를 마음대로 쏘다녔다. 이불 속에서 나는 파티에 가는 아가씨가 되기도 했고 의문의 사건을 파헤치는 탐정이 되기도 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내 시간. 그 시간의 주인은 나였다. 그렇게 나는 낮보다 밤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계절 중에 겨울을 제일 좋아한 것도 밤이 길기 때문일 것이다. 시골의 겨울은 추웠다. 우리 집은 연탄보일러를 뗐고, 단칸방은 천천히 달궈졌다. 어느 때엔 잠자리에 ..
머리가 반백이 되고, 남편을 사별한 친구들이 주변에 늘어나면서, 요즘 더 자주 아버지와 어머니 생각이 납니다. 허총이라도 아버님의 유택을 어머님 곁에 만들어 세워 두 분의 영혼을 모셔야 하겠다는 궁리에 절실해질 때도 있습니다. 아버지는 6.25가 나던 해, 맥아더 장군이 인천에 상륙하던 그날 이북으로 끌려가셨습니다. 인천에 몇 개의 공장을 가지고 계시던 아버지의 기업 운영 지침은 대학생들만을 종업원으로 채용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아버지가 고학으로 대학을 졸업하신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공장은 밤에만 가동하고 낮에는 쉬어야했습니다. 아버지는 검소하고 검약한 근로자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일본 유학을 마치신 세련된 신여성으로 화려한 의상만을 좋아하셨고 그러한 가치관의 차이로 인해 두 분이 자주 다투시는..
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 손수건 한 장을 옆에 두었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할 때 생긴 나의 버릇인데 이젠 아버지의 이야기를 할 때에도 어느 사이 손수건을 챙기게 된다. 사실 아버지에 대해선 감정을 조절할 수 있었다. 나보다도 우선 아버지 자신이 감정에 헤프지 않고 절제 능력이 있으시니 나도 따라서 이유에 앞서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감상에 헤픈 나이지만 상대방이 감정을 이성적으로 다스리면 한풀 물러나 감정을 억제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요즘 아버지를 만나러 갈 때 극히 우울한 마음이 되어 발걸음이 느려진다.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이 아니고 어느 장소건 아버지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내려앉으며 눈물부터 난다. 혈육이 무엇인데 이리 가슴이 아플 수가 있을까. 그 생각..
아침나절에 눈이 살포시 내리더니 날씨가 포근하고 어느덧 하늘은 코발트 그레이로 개며 햇볕이 죄어든다. 오랫동안 난로 온기에 생명을 유지해오던 고무나무와 포인세티아 분을 햇볕이 쬐는 곳으로 옮겨주었다. 포인세티아는 이파리가 다 져서 후리후리한 키에 빨간 꽃만 이고 있는데 바람이라도 불면 바람개비가 되어 뱅뱅 돌것만 같다. 뜰의 작은 장미 나무는 뿌리 언저리에 덮어준 노란 왕겨와 그 위에 아직 녹지 않아 희끗희끗 햇빛을 받고 흰 빛깔로 반짝거리는 눈을 이불 삼아 잠자고 있는 듯 섰어도 어딘지 봄 냄새를 풍긴다. 좁은 마당 한복판에 양자배기를 내놓고 더운 물을 붓고 거기다 가루비누를 풀어 빨래를 했다. 늘 방구석에 화분처럼 앉아서 그림만 그리거나 무슨 생각에 잠겨만 있다가 이렇게 포근한 양지 쪽에서 빨래를 주..
5월은 계절의 여왕이라고 한다. 누가 명명한 말인지는 모르지만 나도 동감이었다. 만물이 소생하고 온갖 꽃이 만발하는 봄이 의당 계절의 여왕좌(座)를 차지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오래 피는 꽃도 있지만 대개는 쉬 지고 만다. 잠깐 피어있는 꽃이건만 이를 시샘하여 부는 꽃샘 바람의 추위가 건강치 못한 나 같은 사람에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5월이야말로 내게는 가장 좋은 달에 속한다. 내 부모가 나를 낳아 준 달도 3월이고, 내가 나의 둘째 딸을 낳은 것도 5월이기 때문에 5월을 더 좋아한다. 초춘, 초하, 초추, 초동의 네 계절 중에서도 초하가 제일 좋은 계절이 아닌가 한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신록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나무는 네 번 꽃을 피운다. 첫 번째는 물어볼 것도 없이 ..
묵은 명함들을 정리했다. 김 아무개, 박 아무개, 최 아무개…. 명함을 한 장씩 손에 들고 그 주인을 생각해 본다. 그러면 그들의 웃는 얼굴이 명함 위에 오버랩되어 보인다. 그러다가 내게 소중한 명함을 골라 상자에 담고 나머지는 휴지통에 버린다. 미안한 일이긴 하지만 모두 계속 보관할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다. 이사, 감사, 변호사, 박사, 사장, 회장…. 서울 남산에서 돌을 던지면 죄다 사장님이나 회장님의 머리에 맞는다더니 세상에는 감투도 많다. 그 사장님과 회장님들이 오늘은 내 손아귀에서 놀고 있다. 내 손이 일진이 좋아 호강을 하는 셈이다. 어떤 명함들은 화려하다. 어찌나 화려한지 나 같은 사람은 명함도 못 내밀게 생겼다. 번쩍번쩍하는 금박지(金箔紙)에 찍은 것도 있다. 종이처럼 금을 얇게 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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